각자의 일상은 너무도 바쁘고, 주변은 너무도 시끄럽다. 빠른 속도와 자극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삶 속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 질문 앞에 조용히 응답하는 책이 출간됐다. 여수의 한 어촌에서 30여 명의 교인들과 살아가는 목회자 김순현의 <영원한 오늘을 사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흔적을 섬세하게 포착해낸 한 영성 목회자의 고백이자 묵상이다.
김순현 저자는 독자들에게 디트리히 본회퍼, 아브라함 헤셸, 유진 피터슨, 마이스터 엑카르트 등 깊은 영성을 지닌 신앙인들의 저작을 한국어로 정갈하게 옮긴 번역가로 익숙하다. 그러나 그의 본업은 목회자이며, 부업은 정원사다. 2019년 첫 책 <정원사의 사계>를 통해 ‘땅을 가꾸는 행위가 곧 하나님의 일’임을 증언했던 그는 이번 신간을 통해, 여전히 흙을 만지고 사람을 돌보며, 영혼을 기도 속에 품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책은 크게 다섯 갈래로 구성된다. 여수의 어촌 교회에서 경험한 바람직한 믿음살이, 기후위기와 생태 파괴 속에서 고민한 창조적 삶의 방식, 영적 스승들의 글을 붙들고 나눈 신학적 대화, 정원과 말씀을 통해 길어 올린 묵상, 그리고 교회 절기를 따라 흐른 영성의 사계절.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것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도서 3:11)으로 오늘을 살아내려는 믿음의 태도다.
저자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신비하게 추상하지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대로 “영원은 주님의 오늘”이며, 본회퍼가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늘 오늘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곧 독자들이 살아가는 바로 이 날, 이 자리, 이 관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이라는 날을 하나님의 시간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놓치고 사는 셈이다.
책은 또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셨던 ‘가장자리’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간다. 슬프고 아프고 소외되고 병든 이들을 찾아가셨던 예수님처럼, 저자도 세상 변두리에 자리한 이웃들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배우고 체험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약한 자를 품는 것이야말로 ‘영원의 중심’을 살아가는 길임을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한 묵상집이 아니다. 정원사를 자처하는 저자의 눈은 땅을 보며 하나님을 본다. 땅의 회복이 곧 창조질서의 회복이고, 대지를 헐겁게 하여 생명이 깃들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으로 그는 생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갈 신자의 사명을 이야기한다. “맨발로 대지에 들어가 신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그 자체로 현대 교회를 향한 예언자의 메시지처럼 울린다.
이 책에서 특별히 돋보이는 문장은 “일상의 성화”에 대한 정의다. 성화란 거룩하게 구별된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눈 뜨는 그 자리에, 손에 쥐어진 그 도구 속에, 익숙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하나님을 발견하는 능력이다. 시인의 펜과 농부의 곡괭이, 여염집 아낙네의 바늘 끝에도 하나님은 계신다는 테야르 드 샤르댕의 말처럼, 저자는 모든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이 책은 단지 따뜻하고 낭만적인 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가뭄과 병충해, 태풍에 상처 입은 정원을 보며 정원사로서 탄식한다. 하지만 그 탄식 끝에서 ‘소명’이란 본래 고되고 괴로운 것이며 동시에 매혹적인 일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곧 목회자이자 신자 모두가 걸어야 할 길, ‘영원을 잇대어 살아가는’ 신자의 삶이다.
어둠이 드리우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한 순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신다는 믿음으로 이 책은 마무리된다. 빛만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그믐밤의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신앙 가운데 이 책은 독자들에게 오늘의 일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 어떤 것인지, 조용히 그리고 깊이 있게 안내한다.
이 책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특히 일상을 성소로 삼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할 만한 영성서다. 거창한 언어 대신 작고 느린 발걸음으로, 그러나 단단한 신학적 고백을 품은 이 글들은, ‘영원한 오늘’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선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