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의 함정, 무신론은 왜 자기모순에 빠지는가

다니엘 베이다 기자.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다니엘 베이다 기자(Daniel Vaida)의 기고글인 ‘무신론자는 결코 일관될 수 없다’(Atheists can never be consistent)를 3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유발 노아 하라리라는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그는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와 같은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진 저자이자 논평가다. 그는 지난 10여 년간 트랜스휴머니즘과 인간 진화에 대한 논쟁적인 견해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자타공인 무신론자다.

필자는 수년 전부터 이런 말을 해왔다. 일관된 무신론자는 허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만약 유발 하라리가 오늘날 무신론을 대표한다면, 그는 무신론자가 아무리 애써도 결코 일관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들은 너무 똑똑해서 스스로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다윈이 구세주인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을 기념한 최근 인터뷰에서 하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게이들은 신화적 성에 대한 관념 때문에 박해받고 억압당했다. 성은 신이 생식을 위해 창조한 것이라는 신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신화’를 파괴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찰스 다윈이다. 하라리는 그를 “성적 해방의 예언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발언은 성 윤리라는 주제를 넘어서,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과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기독교는 성이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한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의 기원은 초월적이며, 개인의 감정이나 욕망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성은 목적(τέλος, 텔로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어떻게 보는가?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다윈이 와서 이렇게 말했다. 생물학에는 목적이 없다. 생물학에는 오직 원인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이 주장에서 혼자가 아니다. 유명한 무신론자이자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에덴강을 따라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는 궁극적으로 어떤 설계도, 어떤 목적도, 선도 악도 없고, 오직 맹목적이며 무정한 무관심만이 있을 뿐이다.”

즉, 이 두 사람은 원칙적으로 허무주의자다. 비록 그들은 이를 부인할지라도, 세상을 그렇게 본다면 다른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다. 그 신발이 맞는다면, 신어야 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은 결코 그것을 신지 않는다. 왜일까?

허무주의는 환상이다

메리엄-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허무주의란 “전통적 가치와 신념이 근거 없으며 존재는 무의미하고 쓸모없다는 관점… 객관적인 진리, 특히 도덕적 진리의 근거를 부정하는 교리”라고 정의된다. 그리고 이 정의는 과장이 아니다. 허무주의라는 개념을 대중화시킨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이 죽었다면”, 모든 도덕과 의미의 해체가 논리적으로 뒤따른다고 말했다.

“허무주의는 고통, 나아가 존재 그 자체에 어떤 ‘의미’도 신뢰하지 않게 될 때 나타난다… 존재 전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며, 모든 것이 헛된 것처럼 보인다.” (<권력 의지> 중)

유명한 허무주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역시 이 모순과 씨름했다. 그의 저서 <시지프 신화>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세상과 조건이 아무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 가운데 의미와 명확성을 갈망한다.” 그는 이것을 “부조리”라 부른다.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 무의미한 현실과 충돌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오늘날의 무신론자들 중 누구도 이런 뒤틀린 세계관이 지닌 논리적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 한 명도 일관되지 않다. 왜냐하면 하라리와 도킨스 같은 무신론자들도 자기 세계관이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모순은 현실에서 드러난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진정으로 모든 것에 목적이 없다면, 인간은 단지 무의미한 육체의 덩어리라면, ‘선’이나 ‘악’은 단지 인간이 발명한 개념에 불과하다면, 인간에게 고유한 가치는 없다면… 그렇다면 왜 동성애자에 대한 ‘박해와 억압’을 비난하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고백한 세계관 안에서 결코 일관되게 살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현실에 내재된 초월적 목적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거부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진리와 자신들이 주장하는 전제 사이에는 깊은 모순이 있다. 그들은 도덕적 가치를 호소하고, “박해”나 “억압”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그러한 개념들이 성립하기 위한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한다. 그것은 철저히 모순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이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무신론자들이 결코 시도하지 않는 길이다. 인간은 자기 자리에 앉은 채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지 말고, 그 보좌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물질주의적·허무주의적 세계관은 결코 의미와 도덕의 기초를 제공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다. 현실이 환상이든, 아니면 무신론적 세계관이 환상이든. 제3의 길은 없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취약한 세계관을 고수하는가?

2018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하라리는 21세기의 과학은 곧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서 지적 설계에 의한 진화로 대체될 것이다. 다만 그 설계자는 구름 위에 있는 신이 아니라, 우리의 지성이고, 우리의 클라우드(디지털 세계)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오만한 태도로는 결코 진리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진리는 지금 무신론자의 눈앞에 서 있다.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에 초월적 근원이 없다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모든 것이 허용된다.” 결국, 도킨스가 묘사한 “맹목적이며 무정한 무관심”은 도덕을 낳지 않는다. 오직 혼돈만 낳는다.

그러나 도덕과 인간의 존엄성, 의미와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단, 하라리는 그것을 자신이 만든 ‘클라우드’ 안에서는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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