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교회, 병원 기반으로 성장… 지역선교 앞장”

목회·신학
학회
장요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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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이병조 교수,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5회 학술발표회서 발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35회 학술발표회 참여자 기념 사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정병준 회장)가 최근 제435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개최했다. 이날 ▲김일환 박사(서울장신대 외래교수)가 ‘제중원 채플과 남대문교회의 설립 역사에 대한 검토’ ▲이병조 교수(알파라비 카자흐국립대)가 ‘러시아정교회의 극동 한인선교와 최관흘 선교사(1865-1917)’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남대문교회, 제중원·세브란스병원과의 연계 속에 설립

김일환 박사는 “남대문교회는 구리개 제중원 및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어 설립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며 이 같은 사실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1893년 7월,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비슨이 내한한 이후 같은 해 11월 1일부터 제중원을 맡았고, 1894년 9월 27일에는 조선 정부와 협상 끝에 제중원의 운영권을 북장로회가 인수하게 된다”며 “이후 제중원 내에서는 전도 활동과 성경 공부, 기도회 등이 본격화되었고, 1895년 상반기에는 일반 환자 및 직원과 함께하는 주일 예배와 수요 기도회가 시작되면서 ‘제중원 채플’이 형성되었다. 이 예배처소는 1902년까지 운영됐다”고 했다.

또한 “1902년부터 1904년까지의 동현교회 시기를 지나, 제중원이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며 세브란스병원으로 개원한 이후에는 병원 구내 한옥에서 주일학교가 시작되었고, 이후 정규 주일 예배, 찬양예배, 수요기도회 등 예배 활동이 체계화됐다”며 “남대문교회는 1909년 11월 21일, 언더우드를 당회장으로, 에비슨과 허스트를 당회원으로 하는 당회를 조직하면서 정식 조직교회로 출범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의 외연 확대도 두드러졌다”며 “남대문교회는 빠른 성장세 속에 용산 지역 17개 마을에 전도 활동을 전개해 용산, 둔지미, 홍주원 등에 예배처소를 마련했고, 이 중 용산과 둔지미는 1911년에 교회로 독립했다”고 했다.

더불어 “1910년 12월 4일에 봉헌된 남대문교회의 새 예배당은 궁궐 철거 자재를 구매해 지어진 것으로, 건축비 전액을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회가 부담한 사례로 기록된다”며 “이는 교회와 선교 의료기관 사이의 긴밀한 연계를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대문교회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며 “첫째, 병원에서 태동하고 병원을 기반으로 성장한 교회로, 세브란스병원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 발전해 왔다. 둘째, 단순한 병원교회를 넘어 지역 복음화에 적극 나선 지역 교회로서, 용산 일대에 전도인을 파송하고 교회를 설립하는 등 지역 선교에 앞장섰다”고 했다.

아울러 “남대문교회는 설립 이후 오랫동안 이 두 가지 특징을 유지한 것으로 생각된다”고 했다.

◆ 장로교의 영향력 확대와 최관흘의 정교회 개종, 정교회 구조적 한계 드러내

이병조 교수는 “1909년부터 1912년까지 불과 3년간 급격하게 확산된 장로교파의 극동지역 선교 활동은, 정교회와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 선교 체계를 흔들었다”며 “장로교의 영향력 확대와 최관흘의 정교회 개종이 불러온 파장이 러시아 정교회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고 했다.

이어 “당시 장로교의 적극적인 선교 확장은 러시아 정교회 측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왔으며, 정교회는 장로교를 외래 종파로 인식하고 이를 두려움 속에 받아들이며 공권력에 의존하는 대응책을 택했다”며 “이는 정교회의 오랜 역사와 극동 지역 선교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민족 선교사업의 기반이 취약했음을 드러낸 사례로 평가된다”고 했다.

특히 “1910년대에 들어 한일합방과 함께 교회 및 교구학교 출신 한인 사제와 교리문답교사들이 등장하면서 한인들의 자발적인 정교회 입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정교회 지도부는 장로교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약 50년에 이르는 한인 선교 사업의 실상과 한계를 노출했다”며 “이는 교세 유지에 필요한 조직, 인력, 재정 등에서 전반적인 부족함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그는 “정교회의 선교 문제는 이미 1860년대 초창기부터 지적되어 온 바 있었다. 당시부터 제기된 인력 부족, 재정난, 체계 부재 등은 1910년대에도 여전했고, 장로교 선교의 도전이 이를 재차 부각시켰다”며 “정교회 지도부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1914년부터 재정 지원 요청과 조직 개편을 시도했지만, 1905년 10월선언 이후 교회와 국가 간 관계가 느슨해졌고, 제1차 세계대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격변 속에 이 같은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고 했다.

이어 “10월 선언 이후, 전제정의 몰락과 함께 교회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 기반을 상실했고, 극동 지방정부 역시 종교 확산을 위한 공권력 활용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며 “이에 따라 한인 선교 현장도 외적 지원이 약화되었으며, 1910년대에 한인들의 정교 입교가 증가하던 분위기 역시 1917년 혁명 이후 급속히 소멸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러시아 정교회는 장기간 극동지역 한인 선교를 지속해왔지만,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아울러 “한편, 짧은 기간이었지만 장로교 선교의 영향은 장기적으로도 유의미했다”며 “최관흘을 비롯한 장로교단의 극동 선교는 이후 소련 붕괴 후 한국 개신교의 러시아 진출 과정에서 법적 등록 문제 해결에 중요한 선례로 작용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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