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분단, 냉전의 격랑 속에서도 변함없이 이웃을 향해 손을 내밀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무장을 택하지 않았고, 복음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섬기고, 먹이고, 꿰매고, 가르쳤다. 신간 <더 급한 곳으로 가라>는 이런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20세기 한국에서 실현된 믿음의 실천과 평화주의적 삶의 모범을 깊이 있게 기록한 역사적 안내서이다.
이 책은 16세기 종교개혁 시기 철저한 신앙과 교회 개혁을 외쳤던 재세례파(Anabaptists) 운동과, 그 전통을 계승한 메노나이트(Mennonites) 교회의 역사, 그리고 이들이 설립한 국제적 구호단체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가 한국에서 수행한 구호 사역을 조망한다.
잊혀진 개혁자들, 평화를 택한 신앙공동체
<더 급한 곳으로 가라>는 한국전쟁기와 그 직후인 1951년부터 1971년까지 약 20년간, MCC가 한국에서 수행한 활동을 중심으로 메노나이트 정신을 소개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가장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간 이들은, 총 대신 밥솥과 재봉틀을 들고, 칼 대신 약과 교과서를 들고 나아갔다.
책 제목인 <더 급한 곳으로 가라>는 바로 MCC의 사역 철학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구절이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점차 아물어가던 1970년대 초, MCC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며 여전히 전쟁 중이던 베트남으로 눈을 돌린다. 그들은 말한다. “보다 급한 곳이 있다면, 우리는 거기로 가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평화사역을 이끌어 온 내면의 목소리였다.
재세례파, 그들이 꿈꾼 교회와 세상
책은 재세례파 운동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기존의 국가교회 제도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성인의 자발적 신앙고백에 기초한 ‘신자들의 세례’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당대 권력과 체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로 인해 이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재세례를 받는 행위 자체가 ‘유죄’가 되었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폭력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려 했던 이들은 오히려 비폭력, 무저항, 평화를 선택했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메노나이트였다.
책은 메노나이트의 핵심 정신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양심과 신앙의 자유. 둘째, 비폭력 평화주의. 셋째,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봉사. 이 정신은 단지 이념이나 교리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의 실천과 삶으로 구체화되었다.
MCC, 20년 한국에서의 헌신
<더 급한 곳으로 가라>의 중심 서사는 바로 메노나이트중앙위원회(MCC)의 한국 활동이다. MCC는 1951년 한국전쟁 중 가장 절박했던 시기에 한국에 들어와 난민구호, 고아 및 과부 대상의 직업훈련, 농촌개발, 의료자문, 아동 보호사업 등 다방면의 사역을 전개했다. 대구·경산 지역을 중심으로 약 80명의 메노나이트 자원봉사자들이 파견되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섬겼다.
이들은 선교사가 아니었고, 정치인도 아니었다. 다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듬기 위해 더 급한 곳으로 나아간 이들이었다. 1971년 MCC는 “한국의 재건은 이제 한국인의 손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자산과 시설을 계명대학교에 무상으로 기증한 뒤, 한국에서 철수한다.
그 철수는 끝이 아니었다. 1995년, MCC는 새로운 ‘급한 곳’, 바로 북한을 향한 지원을 시작한다. 2018~2019년에는 북한에 14만 4천 개의 고기 통조림을 보냈고, 이는 전 세계에 지원한 총량의 20%에 달하는 규모였다. 국경이나 이념을 초월한 사랑의 실천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와 교회를 향한 조용한 물음
<더 급한 곳으로 가라>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독자들에게 묻는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더 급한 곳을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책은 오늘의 교회와 사회가 너무 쉽게 잊고 있는 평화, 자유, 섬김의 가치를 다시금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앞에 놓인 수많은 ‘급한 곳’-난민, 전쟁, 빈곤, 분열-을 향해, 믿음으로, 사랑으로, 조용히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