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 2세기에 ‘기록된’ 다니엘을 주전 6세기 바벨론의 고고학 유물이 증명하고, 주후 1세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도 그에게 역사성을 부여합니다 도전과 응전의 구도를 보면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한눈에 알 수 있고, 그 핵심에 다니엘이란 인물을 사용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전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병사들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합니다. 야훼가 혐오하던 것들이 야훼 신전에 가득했던 셈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단 3:18)라는 구절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록 풀무 불에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의 위치에 마르둑을 둘 수 없다는 결연한 고백을 했습니다.
박양규 – 다니엘 수업
슬며시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친했던 친구에게 연인이 생기고, 꽁냥질이 시작되면 마음에 슬슬 불이 일어난다. 거기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나도 바짝 시동을 걸어야 하나 생각한다. 그런데 방법을 모르겠다. 내 반쪽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의 님을 찾아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있던 자리를 옮겨 볼까 생각했다면 최후의 보루로 남겨 두자. 그것은 가장 나중에, 가장 마지막에 쓸 수 있는 방법이다. 우선 해야 할 일이 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속한 자리를 살펴보자. 가족, 직장, 운동 모임, 교회 등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안 하던 일을 하면 주위에서 “너 죽을병 걸렸냐? 왜 안 하던 짓을 해?” 같은 시답잖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소리를 듣더라도 위축되지 말자. 주변 사람들이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다가, 두 번 보면 ‘이상하다?’ 하겠지만, 세 번 보면 ‘쟤가 정말 달라졌네!’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말자. 주님은 당신 안에 이미 새 일을 시작하셨다.
호산나 – 비포 메리지
플라톤은 성육신과 부활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창조 이야기보다도 더 몸과 영혼에 대한 모든 기독교적 이해의 토대를 이루거나 최소한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지식이 없었던 플라톤이 몸과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영원한 결합을 생각해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부재 속에서 환생 이론은 단지 논리적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능성 높은 결론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영혼과 보이고 끊임없이 변하는 물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이 하나님께서 두 존재를 독특하게 결합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에너지 보존 법칙에 해당하는 자신의 영적 이론에 도달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즉 영혼은 결코 죽지 않으며, 단지 하나의 형태에서 또 다른 형태로 옮겨 다닌다는 것이다.
루이스 마코스 – 플라톤과 예수 그리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