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박사
이경애 박사

심리학에서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선함을 지키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거의 본능에 가까운 성향은 매우 강력해서 아주 어린 영아들까지도 좋은 것은 자기가 취하고자 하고 스스로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뱉어내고 버리고자 하는 특성을 보인다고 한다. 사람이란 존재가 선한 면도 있고, 그렇지 않은 면도 있는 통합적인 존재이며, 우리는 내 안에 존재하는 그 선을 가지고 악하고 부족한 면을 보강해 나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기본적으로 그 악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힘들어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본래는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 아니라고 밀어내고 뱉어내버리고만 그 악한 나의 본성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내가 밀어낸 나의 부정적인 면은 어느 누군가에게 투사된다고 한다. 일단 나의 부정적인 모습이 타인에게 투사되면 나는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질 수 있다. 나의 부정적인 면을 다 비워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본래 내 것임에도 불구하고 토해내고 뱉어내고 밀어내서 타인에게 투사된 나의 부정적인 면은 이제 다시 내게 복수하기 시작한다. 즉, 내가 내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것이라고 부정했던 그 면은 이제 타인에게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부정적인 면이 내게는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왜 내 눈에만 보이는 것일까? 그 부정적인 면이 원래는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 것이었기 때문에 내 눈에는 예민하게 발견될 수밖에 없고, 그 때 본인은 스스로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치명적인 예민한 관찰력과 판단력이 있다고 말이다. 자신은 세상의 부조리와 부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남모르는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이러한 능력이 정말 타인의 부정적인 면을 찾아내는 민감한 심리적 능력이라면 좋겠지만 대개는 내 부정적인 면의 투사의 결과물인지라 나는 나만 아는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그 타인을 미워하게 되며,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내가 사는 심리적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남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부정적인 시각과 판단으로 나는 예민한 것 같으나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둔해지는 것이고, 똑똑한 것 같으나 실상 자신의 마음의 세계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내가 만든 세상이라는 것은 모른 채 말이다.

굳이 ‘네 자신을 알라’는 명언을 남긴 소크라테스를 인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나 자신을 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또 부담스러운 일인지를 본능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기보다는 타인이나 사회, 세상의 부조리에 집중하고자 하고 그 안의 허점과 약점을 찾고자 애쓰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부정적인 모습을 찾으면 찾을수록 나는 문제없다는 묘한 쾌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사가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때는 그 영향력은 더 강력해져서 내가 속한 집단은 선하고, 투사의 대상이 된 집단은 악하다고 판단하는, 단순하고 몹시 위험한 이분법적 논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집단 간 갈등이라는 것이 사실은 이러한 투사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좋으련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자신의 약점을 찾기 보다는 타인의 약점을 찾는데 훨씬 앞선 본성이 있는지라 늘 선과 악의 양분화 된 구도로 상황을 보는데 익숙한 것이다.

이러한 본성에 대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비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투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3절)’ 참으로 놀라운 통찰을 도와주시는 말씀이다. 우리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는 것에 얼마나 탁월한가? 가르치는 것, 훈계하는 것, 명령하는 것에 우리는 몹시 능하다. 이러한 나의 능력에 스스로 자화자찬하며 마치 인생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런데 예수님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먼지에 비하면, 그렇게 비판하는 나의 눈에는 들보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비판하기 전에 네 자신을 돌아보고, 들여다보라 하신다.

전문 상담사가 되려는 과정에는 많은 공부와 실습이 요구된다. 이 때 가장 많이 훈련받는 영역중의 하나가 바로 상담사의 질문하는 태도 혹은 반응하는 방식에 대한 것인데 이 때 가장 경계하는 것이 바로 훈계, 명령, 조언, 충고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자기 경험상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해줄 말이 참 많을 수 있다. 내 경험도 있고, 내가 아는 성경 지식도 있고, 지혜의 말씀이나 경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좋은 경험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상담사가 되려는 훈련 과정에서는 절제하도록 요청된다. 그 보다는 타인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고 신중하게 듣는 것에 더욱 집중하도록 교육받는다. 왜 그럴까? 때로는 나의 경험이, 지식이 판단이 타인을 그대로 보고 공감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 때문이다. 이전의 나의 경험이 도움을 요청하러 온 내담자에게 투사되어 겉 표현으로는 도움이 되는 말인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에서는 자신의 경험적 잣대에 비추어 훈계하거나 심지어 책망할 가능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함인 것이다.

말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똑똑한 말들이 너무 넘친다.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코로나에 대해,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우리 사회는 너무나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다. 말이 많고 다양한 말이 말해지고 들리는 사회는 좋은 사회이다. 다양한 소리에 대한 기회가 제공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말 못하도록 억압되는 사회는 문제 있는 사회일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소리가 들려지는 것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는 자유를 가진 이들의 자기 성찰능력이다. 말할 수 있다고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나의 책망, 훈계, 나아가 비판의 말들이 과연 그들의 문제인가, 아니면 나의 부정적인 내면의 투사의 결과물인가를 한번이라고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덕성의 말, 세우는 말, 칭찬하는 말, 희망의 말은 지금보다 더 하자. 지금은 어느 때보다 가능성, 희망, 격려, 긍정의 말이 귀한 시대이다. 그러나 깎아내리는 말, 비판하는 말, 절망의 말을 할 때는 한 번 더 생각하자. 그 비판이 사실은 내가 받아야 할 비판은 아닌지 한번 만 더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훨씬 더 비판이 줄어들 것이다. 상당부분이 내 들보에게 튕겨져 나간 작은 먼지에 지나지 않을 것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은 굳이 입으로 내 뱉지 않아도 표정으로도 가능하다. 엄마가 자녀를 바라볼 때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보라. 사랑하는 배우자와 연인을 바라볼 때의 눈을 보라. 아름다운 대 자연을 바라볼 때의 경이의 찬 표정을 보라. 주님을 찬양하는 자의 몸의 언어를 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긍정의 언어를 주셨다. 더 많이 더 다양한 방법으로 좋은 이야기를 좋은 태도로 나누는 우리가 되길, 조금 덜 똑똑하고, 조금 덜 비판적이고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추는 가운데 그 틈에서 들려지는 주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길. 그 안에서 발견되는 나의 실존적 모습에 더 부끄러워하고 성장하려고 노력할 수 있길. 새해 첫 달이 지나고 이제 새 달 2월이 시작이다. 들뜬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더 나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email protected]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이경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