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제386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제386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김승태 소장)가 지난 10일 제386회 학술발표회를 ‘줌’을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이날 발표회에선 박형신 교수(남서울대학교)가 ‘존 로스의 한글 신명(神名), 하느님과 하나님에 대한 역사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한강희 교수(한신대 겸임교수, 선교학)가 ‘일제하 기독교계 학교의 항일민족주의 기원과 형성:선교사 오리엔탈리즘의 근대주의적 전유와 변용’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발표했다.

먼저 박 교수는 “구약성경에 출현하는 히브리어 신명(神名) ‘엘로힘(Elohim)’(창 3:8),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신명 ‘테오스(Theos)’(막10:18) 등의 원어(原語)는 이후 기독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므로 현지어로의 번역이라는 필수불가결한 과제에 직면했다”며 “라틴어 ‘데우스(Deus),’ 영어 ‘갓’(God,) 중국어 ‘션(神)’과 ‘샹디(上帝)’가 그러한 사례이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의 한국적 상황에서는, 천주, 하느님, 하나님,  텬쥬(天主), 신(神), 참신, 샹뎨(上帝), 샹뎨님, 샹쥬(上主), 여호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다가, 최종적으로 개신교권에서는 ‘하나님’으로,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으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어 “개신교권의 신명 ‘하나님’은 1882년에 출판된 〈예수셩교요안나복음젼셔〉 ‘서울방언판’부터 채택하여 1887년에 완역된 한글신약성경 〈예수셩교젼셔〉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사용한 번역어”라며 “그 후, 한글성경번역은 한국 내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로스역 개정본을 비롯한 한글성경의 신명 표기는 대체로 당시 서울말 표기로 보이는 ‘하나님’이었으며, 부분적으로 ‘상뎨,’ ‘텬쥬’ 등이 시도됐다. 일제강점기로 들어가는 1910년대부터 시작하여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의 두 가지 신명이 혼용되어 출판됐다. 〈개역한글판〉이 출판된 1956년 이후에는 〈공동번역성서〉를 제외하고는 현재의 2020년에 이르기까지 약 60여 년 동안 대체로 ‘하나님’을 채택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777년에서 1882년에 이르는 기간에, 로스는 중국인들의 표현인 ‘상제’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표현인 ‘천주’를 고려하기보다는, 한국인들의 토착적 표현인 ‘하늘’과 그로부터 도출된 신명 ‘하느님, Hanunim’을 소중하게 여겼다”며 “ ‘하느님’ 표기보다 더 일반적인 표기인 ‘하나님’은 조선사회에서 문헌상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19세기 말에는 동학사상에서도 사용된 신명이다. 로스는 이러한 ‘하느님’ 신명이 매우 독특하고 보편적이며 대중성을 보유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의 첫 저서들인〈예수셩교문답〉(1881),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 〈예수셩교셩셔맛대복음〉(서북방언판, 1882), 그리고 존 매킨타이어가 집필한 〈예수셩교요령〉 (1881)에 서북지역의 음가를 따라 ‘하느님’으로 표기했다”고 했다.

또 “로스는, 1882년에 출판된 〈예수셩교요안니복음젼셔〉(서울방언판)부터 신명으로서 ‘하나님’을 채택했고, 이 원칙은 그의 신약성경 완간본인 〈예수셩교젼셔〉(1887)와 그 후에도 이어진 〈예수셩교셩셔맛대복음〉(1892)와 같은 쪽복음 출판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적용됐다”며 “로스가 ‘하나님’ 신명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유일신론적인 신 관념을 의도적으로 부여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 의미는 애초의 ‘하느님’ 신명에서부터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로스의 ‘하느님’ 및 ‘하나님’ 신명은 간단히 ‘하늘-하느님, 하날-하나님’의 도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며 “서북방언 표기인 ‘하늘’이 서울방언인 ‘하날’로 변화함에 따라, ‘하느님’ 신명 역시 ‘하나님’으로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했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한강희 교수는 “20세기 초 일본 식민지시기에 전개된 다양한 항일독립운동은 단순히 민족주의 감정에 근거한 탈식민주의 의식에 의해서 촉발하지 않았다. 일본 식민주의에 대항했던 민족운동의 근원에는 인간 자유와 평등을 기초로 하는 주체 의식 그리고 봉건제를 극복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려고자 하는 근대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며 “그런데 이러한 근대의식 형성은 이미 식민지 이전부터 개화지식인들을 통해 자극되어 왔다”고 했다.

이어 “개항기 개화지식인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을 목격했고, 서구적 근대 문명을 도입함으로써 부국강병을 구현하고자 했다. 당시 개화지식인들이 수용하고자 했던 서구적 근대주의는 크게 세 흐름 속에서 유입되고 발전했다”며 “첫째는 온건 개화파에게 영향을 준 중국 양무운동(洋務運動)이고, 둘째는 급진 개화파들의 조선 근대화 정책으로 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며, 셋째는 친미 개화파들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미국, 주로 미국 선교사들과의 접촉을 통해 국내에서 서구적 근대화를 진행한 흐름”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한국 근대주의와 항일민족주의 기원에 있어서 개화지식인들과 선교사들과의 만남은 주목할만하다”며 “친미 개화파 지도자들의 서구적 근대화와 선교사들의 문명화 선교의 선택적 친밀성은 공통적으로 한국에 관한 전근대적 인식에 근거해 있었으며, 이는 한국을 근대화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를 형성하게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884년 이후 본격적으로 내한하기 시작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복음화와 문명화라는 두 사명을 수행했고, 이러한 과제는 사회진화론에서 파생하는 ‘서구우월주의’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인식론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며 “선교사들은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인식 틀을 통해서 ‘은자의 나라’ 조선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모든 야만적인 것을 근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 그들의 중요한 목표가 됐다. 이러한 목표와 실천은 선교지 한국을 바라보는 내한 선교사들의 ‘선교사 오리엔탈리즘’(missionary orientalism)이라는 독특한 인식을 구성하면서 진행됐다”고 했다.

또한 “선교사들의 이러한 한국 인식은 부분적으로 친미 개화지식인들도 공유했던 부분이다. 서구 세계의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있었던 친미 개화지식인들은 서구의 눈으로 미개한 조선의 민낯을 들여다보았고, 이러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은 선교사들의 서구식 문명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촉매 역할을 했다”며 “친미 개화지식인들은 기독교화를 근대화의 동의어로 이해했고, 문명의 종교인 기독교와 기독교가 파생하는 가치들을 근대국가 건설에 활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견지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오리엔탈리즘은 적어도 친미 개화지식인들의 근대주의 기획 속에서 전유되었고, 국가 개조는 물론, 식민지 시기 항일민족주의 기원과 형성에 있어서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더불어 “근대주의를 추구하던 친미 개화지식인들이 선교사 오리엔탈리즘을 수용하고 탈식민주의로 변용시키는 역사적 과정은 기독교계 학교를 통해서 전개됐다”며 “근대 전환기 기독교계 학교는 새로운 근대교육의 장으로서, 선교교육과 규율을 통해 한국 학생들이 주체적이고 자립적인 인간형을 담지 하도록 이끌었다. 이와 함께, 선교사들의 근대식 교육은 식민지라는 특수한 시공간적 상황 속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항일 주체로 인식하게 했고, 자신들의 식민지 현실과 그 모순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항일민족의식 형성과 함께 국가적 독립을 행동화하도록 근거를 마련해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식민지 시기 변용된 오리엔탈리즘과 기독교계 학교 그리고 근대 민족주의 지식 생산이 갖는 의미는 먼저 오리엔탈리즘은 선교사들의 서구 제국주의적 인식론으로만 기능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전유되고 그들의 목적에 맞게 변용된다는 사실”이라며 “둘째, 일제하 기독교계 학교를 둘러싼 선교사, 한국인, 일제 사이의 마찰은 이 세 주체들의 각기 다른 오리엔탈리즘적 인식론이 주조하는 ‘인간형’에 대한 기대 차이에서 비롯했다는 것 셋째, 근대 항일민족주의 형성의 근저에는 중층적 오리엔탈리즘들의 경쟁 혹은 타협이라는 양가적 상호작용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선교사 오리엔탈리즘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정당화해주는 기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며 “오리엔탈리즘은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그리고 일본 식민주의자들과의 삼각구도 속에서 중층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각 주체들의 상호적 이해관심을 투영하고, 또 그들의 상충하는 관심사들을 실천으로 옮기는 인식론적 근거로 작동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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