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호 목사의 영혼의 양식 72] 그러나 너는 말씀에 거하라

오피니언·칼럼
디모데후서 3장 12-17절

제목
그러나 너는 말씀에 거하라

 

성경
디모데후서 3장 12-17절

서론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부터 17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12절부터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3장 1절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우 무거운 말씀으로 3장을 시작합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그리고 그 고통의 시대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고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χαλεπός(칼레포스, chalepos)’는 단순히 힘들고 괴롭다는 정도보다 강한 말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한, 사나운, 다루기 힘든 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고통하는 때란 단순히 살기가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어려워지고,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기 어려워지는 시대입니다.

본론

2–5절이 그 고통의 실체를 설명합니다. 결국 사랑의 대상과 순서가 뒤바뀐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앞서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보다 쾌락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관계와 삶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 결과가 2–4절에 열거된 탐욕, 교만, 비방, 불순종, 무정함, 모함, 무절제, 사나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5절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입니다. 신앙의 모습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형식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말씀은 알고 있는데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을 말하지만 삶에서는 믿음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말하지만 실제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보다 자신이 있습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그 믿음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신앙인처럼 보이는 것이고, 경건의 능력은 신앙 때문에 실제로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6–13절에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진리를 대적하고, 속이고 속으며,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오히려 박해를 받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이 말씀은 참 두렵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 그런데 계속 속이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까지 속게 됩니다. 거짓말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반복하다 보면 자신도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욕심인 줄 알았는데 계속 합리화하다 보면 그것을 권리라고 생각합니다. 잘못인 줄 알았는데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잘못이라고 느끼지 못합니다. 죄가 무서운 것은 죄를 짓는 것만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의 대답이 14절입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오늘 말씀의 중심은 바로 이 한마디입니다. “그러나 너는.” 세상이 그렇게 살아도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속이고 속아도 그러나 너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남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져도 그러나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상을 피해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싸워 이기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일”은 무엇입니까?

1.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여기에는 세 가지 중요한 흐름이 있습니다. 배우고, 확신하고, 거하는 것입니다. 먼저 배워야 합니다. 믿음은 막연한 감정이 아닙니다.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면서 열심만 내는 것이 신앙은 아닙니다. 디모데는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바로 앞 10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박해와 고난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서만 배운 것도 아닙니다.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면 디모데에게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의 거짓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말씀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확신한 일”은 단순히 몇 가지 성경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믿음의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바울을 통하여 확인한 복음의 진리, 그리고 그 복음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배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확신해야 합니다. 부모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목사의 믿음이 내 믿음이 될 수도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자동적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말씀이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주라고 들었습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십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거하라.” 배웠고 확신했다면 이제 그 진리 안에 계속 머물라는 것입니다. 신앙에서 정말 어려운 것은 한 번 믿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거하는 것입니다. 한 번 은혜받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은혜 안에 계속 살아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한 번 결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결단을 평생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것을 찾아라”고 하지 않고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새것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2. 성경을 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진리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여기서 “알았나니”는 단순히 성경에 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알다, 이해하다, 인식하다’라는 의미로, 이미 알게 된 것을 지금도 알고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야, 너는 지금 처음 성경을 접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자라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성경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66권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까?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는 것입니까? 많은 구절을 암송하는 것입니까? 물론 이런 일들은 모두 중요합니다. 성경은 읽어야 하고, 배워야 하고, 묵상해야 하며, 반복해서 읽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5절은 “성경을 알았나니”에서 멈추지 않고 곧바로 그 목적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바로 여기에 성경을 아는 목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알았던 성경은 일차적으로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구약의 말씀은 결국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을 안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성경을 바르게 아는 것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여러 번 통독하고 많은 말씀을 암송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목적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무슨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이 말씀은 나를 어떻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성경을 알았나니”는 지식의 종착점이 아니라 믿음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을 알면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면 믿음으로 나아가며,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다음 16절이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어떻게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한 사람의 삶까지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창세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 그리고 구원의 약속을 봅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종 되었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제사와 희생제물을 통하여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선지자들의 말씀 속에서 약속된 메시아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마침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알아야 합니까? 먼저 읽어야 합니다. 읽지 않고 알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배워야 합니다.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역사책처럼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안다고 하면서 말씀과 전혀 관계없이 산다면 성경을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과정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읽어서 알고, 배워서 깨닫고, 믿어서 확신하고, 순종하여 삶으로 아는 것입니다.

3.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까? 16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헬라어로 테오프뉴스토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뜻하는 테오스와 숨을 내쉰다는 의미가 결합된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감동은 우리가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감동받았다”고 말할 때의 감동과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내쉬신 말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쓴 책에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권위가 있습니다. 내 생각보다 말씀이 높습니다. 시대의 유행보다 말씀이 높습니다. 사람들의 여론보다 말씀이 높습니다. 심지어 목사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자꾸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말씀이 내 생각과 맞는가?” 그러나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이 말씀과 맞는가?” 우리는 “이 말씀이 지금 시대에도 맞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맞게 살고 있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가 말씀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평가해야 합니다. 그래서 16절은 계속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는 네 가지 일을 말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먼저 교훈입니다. 말씀은 무엇이 옳은지를 가르쳐 줍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무엇이 선한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가르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세상의 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책망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책망”은 단순히 야단치거나 꾸짖는다는 의미보다 잘못을 드러내고, 죄를 깨닫게 하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우리를 책망하시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합리화하거나, 죄를 반복하면서 점점 무감각해질 때입니다. 특히 디모데후서 3장의 문맥에서는 사람들이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상태가 됩니다. 남을 속이다가 결국 자기 자신까지 속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기기만을 깨뜨리는 것이 말씀의 책망입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책망하십니까? 16절의 문맥에서는 가장 먼저 성경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배운 말씀을 묵상할 때 어느 순간 말씀이 내 마음과 행동을 비추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의 표현처럼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말씀은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때로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서 내가 감추고 싶었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망의 핵심은 ‘혼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던 죄를 보게 하고,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을 잘못이라고 깨닫게 하며, 내가 옳다고 주장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합니다. 책망은 정죄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책망하시는 목적은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들거나 무너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다음 단어가 “바르게 함”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바르게 함입니다. 하나님은 잘못을 지적하고 끝내지 않으십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다시 바른길에 서도록 하십니다. 미워했다면 용서하게 하시고, 거짓말했다면 진실하게 하시며, 상처를 주었다면 사과하게 하시고, 욕심을 부렸다면 내려놓게 하십니다.

말씀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세우기 위해 책망합니다. 구조를 보면 매우 분명합니다. △교훈=무엇이 옳은지를 알려 주십니다. △책망=내가 어디에서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바르게 함=잘못된 자리에서 돌이켜 바로 세우십니다. △의로 교육함=다시 같은 길로 가지 않도록 훈련하십니다.

네 번째는 의로 교육함입니다. 여기서 ‘교육’이라는 말은 단순히 지식을 가르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녀를 양육하듯 가르치고 훈련하여 성숙하게 만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훈련합니까? “의로” 교육합니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는 것을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 삶에서 반복해서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신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한 번 했다고 건강한 몸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피아노를 한 번 연습했다고 연주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반복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말씀을 들었다고 성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용서했다고 용서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한 번 정직했다고 정직한 사람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또 순종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울 때 또 용서하고, 화를 내고 싶을 때 절제하고, 손해가 생겨도 정직을 선택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선을 행하는 일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처음에는 힘들었던 순종이 점차 우리의 삶이 되고, 삶이 성품이 됩니다. 이것이 의로 교육함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에게 “이것이 옳다”고 알려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훈으로 옳은 길을 보여 주시고, 책망으로 잘못된 것을 깨닫게 하시며, 바르게 함으로 다시 옳은 길에 세우시고, 의로 교육함으로 그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훈련하십니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바로 다음 17절에 그 목적이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경이 우리를 읽기 시작합니다. 말씀이 내 생각을 읽고, 내 욕심을 드러내고, 내 잘못을 지적하고, 내 삶을 바로잡기 시작합니다.

4.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훈련하십니까? 17절에 최종 목적이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성경의 최종 목적은 성경 지식이 많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면 삶에서 무엇인가 달라져야 합니다. 말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돈을 사용하는 방법이 달라져야 합니다. 용서하는 방식이 달라져야 합니다. 어려움을 견디는 힘이 달라져야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달라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의 목적은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사람의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성경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인도합니다. 16절에서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훈련합니다. 그리고 17절에 이르면 마침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웁니다. 그러므로 이 세 절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습니다. 말씀으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합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후서 3장은 두 종류의 사람을 보여 줍니다. 앞부분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며 경건의 모양만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나옵니다. 무엇이 이 둘을 갈라놓습니까?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도 그러나 너는, 세상이 악해져도 그러나 너는, 사람들이 속이고 속아도 그러나 너는,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아져도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해졌는지를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만으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거하고 있는가입니다. 세상의 생각에 거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의 평가에 거하고 있습니까? 내 경험과 고집에 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나 읽는 것으로 끝내지 마십시오. 배우십시오. 그러나 지식으로 끝내지 마십시오. 확신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거하십시오. 그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말씀이 나를 가르치도록 하십시오. 말씀이 나를 책망하도록 하십시오. 말씀이 나를 바로잡도록 하십시오. 말씀이 나를 훈련하도록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 말씀이 우리를 바꾸어 갈 것입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에서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갈 것입니다. 속이고 속는 시대를 이기는 길은 세상을 더 많이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그 말씀을 확신하고, 그 말씀에 거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하나님의 음성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그 말씀에 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춘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 가실 것입니다.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배우고 확신한 말씀에 굳게 거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깨닫고 바르게 고침받아 의로운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세우셔서 어디에서든 선한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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