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성서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읽어 낸 구약학자 고(故) 월터 브루그만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붙든 화두는 바로 ‘권력’이었다. 신간 『성서와 권력』은 전작 『성서와 가난』이 고발했던 ‘만들어진 가난’을 넘어, 그 가난을 양산하고 억압을 고착화하는 권력의 실체를 날카롭게 겨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그가 남긴 에세이들을 엮은 이 책은, 우리 시대의 폭력적인 권력들을 해부하고 피억압자 곁에 서는 하나님의 유일한 권세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거장의 마지막 증언이다.
세속의 권력을 넘어선 단 하나의 권세
브루그만의 시선은 세상의 주관자들을 예리하게 의식하면서도, 장차 모든 무릎이 꿇게 될 단 하나의 권세인 ‘하나님’을 향해 굳게 고정되어 있다. 그는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조롱하는 권력은 곧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를 조롱하는 것이며, 가난한 자와 연대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조롱받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오늘날의 교회가 하나님의 찬란하고 행복한 통치만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영광의 신학’이나 ‘값싼 은혜’에 머물러 있다고 꼬집는다. 침묵과 폭력이 되풀이되는 사회일수록 교회는 밑바닥으로 밀려난 사람들을 대변하는 ‘십자가의 신학’을 당차게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
현대 사회의 비극을 비추는 성서의 빛
이 책은 총기 난사와 이민자 혐오, 사법 불의와 기후 위기, 국가주의와 트랜스휴머니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가장 뜨거운 현안들을 성서 본문 곁에 나란히 세운다.
미국 대법원의 판결 이면에 숨겨진 기득권의 독점욕을 꿰뚫어 보고, 기술과 자본을 앞세운 인류세(Anthropocene)의 오만함을 창조주를 향한 송영(頌榮)으로 깨뜨린다. 브루그만에게 신학적 사유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취약한 민중들을 짓밟는 글로벌리즘과 폭력의 시스템에 맞서는 가장 실천적인 무기다.
짓밟힌 이들 곁에 서는 예언자의 마지막 선물
브루그만이 권력 앞에서 느낀 불안은 세속 권력에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아니었다. 그 권력이 무력한 이들에게 해를 입히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파괴할 것에 대한 깊은 탄식과 연민이었다. 일평생 자신보다 타인과 약자를 먼저 걱정했던 그의 신학적 여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시대를 흔들어 깨웠던 위대한 신학자는 이제 이 책을 통해 평생의 사유를 묵묵히 매듭짓는다. 권력이 전부라고 외치는 세상 속에서 다른 세계를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고통받는 이웃과 굳건히 연대하길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은 가장 담대하고도 묵직한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