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들이 곁을 떠날지라도: 정치화된 세상 속에서 강단이 지켜야 할 진리의 무게

마크 크리치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오늘날의 성공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설교는 실패였다"(Jesus' famous sermon was a failure by today's standards) 8월 2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늘날 사역의 성공을 평가하는 거의 모든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설교는 처참한 실패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수천 명의 사람을 끌어모으셨다.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도 오천 명의 남자를 기적적으로 먹이셨고, 그분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사람들은 급기야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 했다. 이런 수준의 영향력과 흡인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지 않은 설교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은 설교하셨다. 그분은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 가르치셨다(요 6:51-58). 그 표현은 당시 많은 청중에게 충격적이고 불편하게 들렸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씀을 두고 수군거리고 불평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청중을 다시 붙잡기 위해 예화를 잘못 선택했다고 해명하지 않으셨다. 표현이 지나쳤다고 사과하지도 않으셨고, 사람들이 떠날 것 같다는 이유로 메시지를 수정하지도 않으셨다. 출석자 수가 갑자기 줄어들었다고 긴급회의를 소집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말씀하셨고, 결과는 현대 목회자의 눈으로 본다면 참담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

오늘날의 기준으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설교는 교회를 텅 비게 만든 셈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식인 풍습을 가르치신 것은 아니다. 앞서 그분은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위해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렬한 언어로 가르치고 계셨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향해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물으셨다. 예수님은 군중을 붙잡아 두기 위해 진리를 타협하지 않으셨다. 오늘날의 강단은 이 불편한 교훈을 진지하게 새길 필요가 있다.

신실함은 거칠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단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기 위해 공격적으로 말하는 것이 신실함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설교자는 거칠고 무모하며 불필요하게 도발적인 말을 쏟아낸 뒤 스스로 “진리의 입장을 지켰다”고 자평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실함이 아니다. 진정한 신실함은 잔인함 없는 용기와 무모함 없는 확신, 그리고 불필요한 상처를 만들지 않는 진리를 요구한다. 진리를 말한다는 명분 아래 상대를 모욕하거나 자극하는 것은 성경적인 담대함과 다르다.

강단 역시 특정 정당의 선거운동 본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보수정치나 진보정치에 세례를 베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도 위험이 있다. “정치적이 되지 않겠다”는 결심이 지나친 나머지, 정작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문제를 강단이 의도적으로 피해 가는 경우다.

‘정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할 수 있는가

과거 필자가 목회하던 시절,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그 영향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점점 깊은 부담을 느끼게 됐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온전히 전하려면, 비록 그것이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놓인 문제라 해도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부분은 다뤄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물론 그런 설교에는 대가가 따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수도 있었고, 출석률이 줄어들 수도 있었으며, 심한 경우 목회자의 자리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확신이 두려움을 이겼고, 필자는 에스더의 고백인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를 떠올렸다.

그 후 필자는 성경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당시 사회를 분열시키던 여러 문제를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일부 교인들은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오히려 많은 성도는 그런 가르침에 목말라 있었고 교회 출석도 증가했다. 그러나 결과가 반대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중요하다. 신실함은 사람들이 남았는지 떠났는지로 결정되지 않는다.

세상이 어떤 도덕적 문제를 ‘정치화’했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하는 바를 교회가 더 이상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낙태는 정치적인 쟁점이 됐고, 결혼과 성윤리도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다. 도박과 약물 남용, 부모의 권위와 종교의 자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 역시 정치적 영역에서 다뤄진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는 순간 설교자는 모두 입을 닫아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정당이 아니라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특정 보수정당이 낙태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태아를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근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인간 생명에 고유한 존엄성이 있다는 성경적 확신에 있다.

교회가 결혼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이해하는 이유 역시 특정 정당의 정책 강령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주장은 결혼이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 안에 세우신 제도라는 성경적 이해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동일하게 적용돼야 한다.

진보 진영이 성경적 가르침과 충돌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러나 보수 진영이 하나님의 기준에 어긋나는 정책이나 행동을 취할 때 역시 동일하게 말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의 일부 정책을 지지한다고 해서 그 정치인이 성경적·도덕적 검증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의 표적은 민주당도 공화당도 아니다. 강단이 겨누어야 할 대상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이다. 어느 편에 속했든 성경의 판단을 받아야 하며, 그 어떤 정당도 강단을 소유할 수 없고 그 어떤 정치 세력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검증의 칼날을 피해 갈 수 없다.

진실한 설교는 때로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이것은 결국 신실한 설교가 때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이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일부러 진리를 불쾌하게 포장하지 않으셨지만, 사람들의 호감을 유지하기 위해 진리를 협상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으셨다.

많은 사람이 떠나간 뒤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다시 “너희도 가려느냐?”(요 6:67)고 물으셨고, 그때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고 대답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어쩌면 바로 이 확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기꺼이 환영해야 한다. 불필요한 상처를 줄여야 하고, 긍휼과 겸손과 사랑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을 붙잡아 두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린 나머지, 정작 그들이 가장 들어야 할 생명의 말씀을 삼켜버려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설교하셨고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이 떠난다는 이유로 진리를 바꾸지 않으셨다. 진리는 사람들의 인정이나 출석자 수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잊은 교회는 언젠가 뼈아픈 역설과 마주하게 될 수 있다. 군중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희생했지만, 결국에는 군중도 잃고 영생의 말씀도 잃어버렸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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