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반유대주의는 왜 다시 확산되는가? 그리스도인이 주목해야 할 3가지 이유'(3 reasons antisemitism is back — and why it matters to Christians)를 8월 2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반유대주의에 맞서는 ‘J7 대규모 공동체 태스크포스(J7 Large Communities’ Task Force Against Antisemitism)’의 새로운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은 치명적인 공격 건수와 사상자 수 모두에서 지난 30여 년 사이 최악의 반유대주의 테러가 발생한 해로 기록됐다.
이 보고서를 다룬 CBS 보도에 따르면, 여기에는 호주 본다이 해변에서 총격으로 숨진 15명, 영국 맨체스터의 유대교 회당에서 살해된 2명, 미국 워싱턴 D.C.의 유대인 박물관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2명, 그리고 콜로라도주 볼더에서 화염병 공격을 받은 뒤 한 달 후 숨진 82세 여성 등의 희생이 포함됐다.
가해자들은 종종 자신들의 행동을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벌인 군사작전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표적은 이스라엘의 군사시설이나 정부기관이 아니었다. 과거 수많은 반유대주의 폭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공격 대상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세계 곳곳에서 무작위로 선택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동안 비이성적인 증오와 폭력의 표적이 되어왔다. 구약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하만의 음모에서부터, 로마시대의 유대인 학살과 중세·근대 유럽의 반복된 박해, 러시아 제국 시절의 포그롬(pogrom)에 이르기까지 반유대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건은 단연 1930~40년대 나치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였다.
그 참혹한 대학살의 여파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공동체에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기억과 정체성에 깊이 새겨진 집단적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이 오래된 증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일까.
1.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같은 이름들이 과거처럼 생생한 경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대가 늘고 있다. 희생자와 가해자, 해방군을 포함해 당시 사건을 직접 경험했던 이들 대부분도 세상을 떠났다. 생생한 목격자들의 증언이 점차 사라지면서, “두 번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역사적 교훈 역시 이전만큼 강렬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암기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인간이 얼마나 쉽게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는지를 다음 세대가 배우도록 하는 도덕적 장치다. 그 기억이 희미해질수록 과거의 증오가 새로운 언어와 형태를 입고 다시 나타날 위험도 커진다.
홀로코스트 이후 국제사회가 공유했던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어떤 민족이나 종교집단을 집단적으로 악마화하는 언어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폭력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먼저 인간을 집단으로 묶어 혐오하고, 개별적인 인격과 존엄을 지워버리는 과정이 선행된다.
그러므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는 일은 단지 유대인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다. 인간 사회가 어떻게 증오와 폭력으로 추락하는지를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
2. 모든 것을 의심하는 냉소주의가 미덕이 됐다
두 번째 이유는 오늘날 문화 속에서 ‘회의주의’와 냉소가 일종의 지적 미덕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데 있다.
C. S. 루이스의 『마지막 전투』에 등장하는 난쟁이들처럼, 오늘날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회의 주류 서사에 속아 넘어가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정보에 밝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회의가 새로운 증거나 더 깊은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진 거의 모든 설명을 일단 의심하고 거부하는 태도로 변질될 때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역사적 사실까지 음모론의 재료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홀로코스트의 규모를 축소하거나 부정하고, 반유대주의를 과장된 문제라고 주장하며, 심지어 유대인들이 정치와 금융, 언론을 은밀하게 통제한다는 오래된 음모론까지 새로운 언어로 되살리는 것이다.
철학자 필립 리프(Philip Rieff)가 말한 ‘죽음의 작업(deathwork)’이라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문화적으로 형성된 의미와 도덕적 합의를 해체하는 데서 일종의 지적 쾌감을 얻는 태도와 닮아 있다.
진실을 찾는 것보다 “당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은 기득권이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더 매력적인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서 반드시 더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 냉소는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맹목이 된다.
3. 오래된 증오가 새로운 정치 언어를 입고 돌아왔다
오늘날의 반유대주의는 과거와 똑같은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때로는 정치적 분노, 반이스라엘 운동, 반자본주의, 민족주의, 음모론 등 다양한 언어와 결합해 나타난다.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이나 군사행동을 비판하는 것 자체는 반유대주의와 동일하지 않다. 정부의 정책은 당연히 비판과 검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이 세계 곳곳의 유대인 개인을 향한 증오와 폭력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런던이나 시드니, 워싱턴 D.C.에 사는 평범한 유대인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에 대해 집단적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유대교 회당과 학교, 박물관, 상점, 개인이 공격 대상이 된다면 그것은 정치적 비판이 아니라 민족과 종교를 이유로 한 집단적 혐오다.
이 점에서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과거의 반유대주의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표면적인 명분은 달라졌지만, 결국 개인을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지 않고 ‘유대인’이라는 하나의 집단으로 뭉뚱그려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에는 기독교적인 요소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반유대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홀로코스트의 실상이 세상에 완전히 알려지기 전인 1943년, 기독교 변증가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유대인 혐오에 대해 중요한 지적을 남겼다.
그는 반유대주의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이셨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분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 안에 위치시킨다. 예수님의 유대인 정체성은 우연한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유대인 혐오가 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만으로도 반유대주의를 배격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으며, 인종이나 민족을 이유로 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기독교적 인간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러나 유대인과 기독교의 관계는 그보다도 더 깊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서 시작해 이스라엘의 역사와 선지자들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어진다. 신약성경의 최초 제자들과 사도들 역시 대부분 유대인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읽는 구약성경 자체가 유대 민족의 역사와 신앙 속에서 전해진 문서다.
예수님의 유대인 되심 역시 그분의 역사적 정체성과 떼어놓을 수 없다.
따라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뿌리 자체와도 충돌한다.
그리스도인이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수는 있다. 팔레스타인인의 고통과 인권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치적·도덕적 판단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이나 공동체를 증오하는 태도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모든 정치적 비판을 억누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필요한 것은 분명한 구분이다. 정부와 정책은 비판할 수 있지만, 사람의 민족적·종교적 정체성은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반유대주의가 다시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의 존엄을 얼마나 일관되게 믿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이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