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과 극단주의 사이에서: 좌우를 넘어 예수의 길로

브랜든 쇼월터 기자.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자이자 평론가인 브랜든 쇼월터 기자의 기고글인 ‘복음주의자들은 왜 우파의 복음 왜곡을 늦게 알아차렸는가’(Why Evangelicals have been slow to discern Right-wing distortions of the Gospel)을 7월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왜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정치적 우파에서 비롯되는 '복음의 왜곡'을 분별하고 저항하는 데 그토록 큰 어려움을 겪는지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물론 이 질문에는 복잡하게 얽힌 여러 층위가 존재하며, 지금처럼 격동하는 시대에는 그 복잡성이 한층 더 가중된다. 하지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좌파가 쏟아내는 악의적이고 터무니없는 비난에 시달리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나머지, 정작 우파의 왜곡에 대한 '진짜 경고'가 나올 때쯤엔 아예 귀를 닫아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겪은 일화와 최근 역사에 대한 약간의 문화적 분석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해 보고자 한다.

어느 선량한 목사의 억울한 낙인

몇 년 전, 필자가 아는 시골의 한 선량한 메노나이트(Mennonite) 목사가 교단 내 특정 세력에 의해 명예가 심각하게 실추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를 조장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결코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으며, 그의 뼛속에는 차별이나 편협함이라곤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교단 내에서 수정주의적 성 윤리를 수용하려는 주장에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꼈고, 이 문제에 대해 역사적인 기독교의 관점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다. 그의 에세이는 피부색과 성적 행동이 왜 범주적으로 같을 수 없는지 신중하게 구분하며, 이 둘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논증했다.

그러나 이 목사의 말은 악의적으로 왜곡되었고, 인종차별과 편협함에 대한 날 선 비난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단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한 신학교 교수는 LGBT(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그의 교회에 찾아가 전복적인 시위를 벌여야 한다고 선동하기까지 했다.

불행히도 필자는 여러 교파에 속한 신학적으로 정통한 복음주의자들이 겪은 이와 비슷한 사례를 수없이 알고 있다. 이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원치도 않은 갈등의 한복판에 내몰렸고, 졸지에 인종차별적이고 편협한 혐오주의자로 낙인찍혔다. 이는 지난 수년간 악의적인 선동가들과, 늑대가 없는데도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자들이 즐겨 써온 수사적 무기였다.

수십 년간 우리 사회를 괴롭혀온 인종 문제에 민감한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비난이 실제로 먹혀든다. 선량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향해 끔찍한 비난을 쏟아내는 교활한 모략가들이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처럼 영악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쩔쩔매며 해명하고, 백인 우월주의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증명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악의적인 선동가들이 쳐놓은 위선적인 덫에 불과하다.

'양치기 소년' 효과: 가스라이팅과 극단주의의 탄생

필자가 잘 아는 이런 개인적 일화들을 차치하고라도, 불과 6년 전인 2020년 여름 우리는 사회 전반에서 이러한 역학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을 목격했다. 2020년 여름의 절정기에,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충격과 슬픔을 표하며,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흑인의 생명 역시 절대적으로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을 필자는 분명히 기억한다.

미디어에서 시스템적 인종차별에 대한 담론이 끓어오를 때, 수많은 기독교인과 목회자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맹점을 점검하고, 특정 경찰 관행을 재고하며, 소수 인종이 공권력과 겪었던 고통스러운 경험에 귀를 기울이려 했던 모습도 생생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 가혹한 시기에, 그 계절은 분명 하나의 문화적 변곡점이었다.

하지만, 무질서 속에서 사회 전반에 걸쳐 선포되던 그 거대한 운동의 '마르크스주의적 기반'에 대해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명하기 시작했을 때는 어떠했는가? 지자체들이 경찰 예산을 삭감하려는 움직임에 주저함을 표했을 때는?

수많은 복음주의자와 시민들은 즉각 그것이 절대 건드려선 안 되는 '성역'임을 깨달았다. 기업 미디어들이 승인된 내러티브를 제도적으로 강요하면서 소셜 미디어는 '검은 사각형(Black squares)'으로 도배되었다. 문화계 최상층부에서는 마치 똑같은 대본을 읽는 듯한 단호하고 일방적인 도덕적 선고가 쏟아졌다. 아주 균형 잡힌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조차 완전히 그 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면 사악하고 편협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중요한 맹점을 지적하는 선량한 사람들을 향해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맹렬하고 가혹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비난의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은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미국인은 결코 뼛속까지 인종차별적인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양치기 소년(wolf-crying)' 현상의 무서운 점이다. 거짓 선동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지쳐버린다. 그리고 결국, 정당한 경고나 진정한 도움의 요청조차 귀를 닫아야 할 헛소리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특히 온라인을 중심으로 '진짜 늑대들'과 실제적인 인종차별 정서가 급증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안타깝게도 이미 많은 이들이 그것을 무시하도록 조건화되어 버렸다.

게다가 대혼란이었던 2020년을 제외하더라도, 평범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에게 도널드 트럼프가 정치에 입문하기 훨씬 이전부터 겪었던 문화적·정치적 참여 경험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대다수 인류가 믿어온 가치(특히 사회적 이슈에 관하여)를 고수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자신들이 끔찍한 차별주의자라는 모욕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다고 말이다. 언론은 그들의 말을 왜곡하고 문맥을 잘라내거나, 주류 언론 기자와 여러 번 인터뷰를 하더라도 정작 그들의 입장은 전혀 실리지 않기 일쑤다(필자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들은 우파 광신도, 진보의 적, 무식한 시골뜨기, 과학과 동성애자와 여성을 혐오하는 자로 불려왔다. 자기 혐오에 빠진 성적으로 억압된 위선자, 맹목적 애국주의에 찌든 쓰레기, 못 배운 구제불능자(deplorables). 조롱과 경멸을 받아 마땅한 지적으로 멍청한 자들. 그리고 오늘날 그들은 종종 '기독교 민족주의자(Christian nationalists)'로 불린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 이런 멸칭에 걸맞은 추악함을 지닌 자들이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분명 존재하며, 그 정도의 차이도 확실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당신이 아는 '평범하고 정상적인(normie)' 평균적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모습인가? 결코 아니다. 어림없는 소리다.

백인 보수 성향의 기독교 남성들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이 아무리 도덕적이고 선량하더라도, 수많은 이들이 교육 기관과 문화적 유행을 선도하는 자들로부터 지난 수년간 "너희는 특권층이고, 구제 불능의 쓰레기이며,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다"라는 메시지 폭격을 받아왔다.

미디어, 초중고교, 대학을 통해 이 끔찍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주입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 분노한 30세 이하의 젊은 우파 남성들이 매노스피어(manosphere, 남성 중심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급진화되고, 끔찍한 백인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적 병리 현상을 흡수하며 불만을 터뜨리는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인가?

이 젊은 남성들이 기성세대의 미온적이고 나약한 대응을 보며 무엇을 느꼈을지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남성성은 '유독(toxic)'한 것이며, 그저 착하고 매력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 미덕의 정점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 그들은 경건함이란 그저 밟으면 밟히는 '수동적인 발매트'가 되는 것이며, 묵묵히 모든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또한 자신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극우 프린지(변방) 그룹의 사람들을 향해 무대 위에서 보여주기식 단절과 규탄을 행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사이, 진보적인 교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대명사를 뻔뻔하게 바꾸고, 스스로를 악한 것들의 '동맹(ally)'으로 선언했다. 예수님을 마치 코스튬처럼 겉옷으로만 걸친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들은 막대한 문화적 자본을 바탕으로 사회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잣대를 알아차린 지각 있는 기독교 남성들은 이 모든 신성모독을 그저 온유하고 부드러운 태도로 수용하고 인내해야 한다고 강요받는다.

물론 분명히 해두자면, 이 중 그 어떤 것도 핑계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모욕을 내면화한 뒤 수동성을 던져버리고 백인 민족주의와 유대인 혐오로 도피하는 남성은 그저 책임에서 도망칠 또 다른 비겁한 탈출구를 찾은 것일 뿐이다. 그것은 참으로 뒤틀리고 경건하지 못한 반응이다.

진짜 문제는 양쪽 모두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신학적, 문화적 좌파는 여전히 엘리트 제도권의 막강한 권력을 불균형적으로 장악하고 있고, 정체 모를 자금으로 넘쳐나며, 주요 미디어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이 억압받고 소외된 자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이 기막힌 역전은 끝이 없다. 이 중 일부는 쓰레기 같은 음모론으로 가득 찬 대안 언론과 팟캐스트 세계의 부상과 맞물려 기형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필자가 아는 진실하고 성경을 믿는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은 진보 진영에서 주로 비롯된 파괴적인 이단 사상들로 인해 교단과 교회가 산산조각 나는 것을 수년간 지켜보며 완전히 탈진하고 가슴이 찢어졌다. 그들이 좌파를 더 파괴적인 세력으로 보는 이유는, 실제로 여러 면에서 좌파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좌파의 끝없는 '거짓 선동'을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널리 퍼진 반역과 배도의 거대한 물결에 맞서 성경에 뿌리를 둔 기준과 하나님의 의를 지켜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을 견디며 살아왔다. 앞서 언급한 비판 이론과 수정주의적 성 윤리, 그리고 롭 벨(Rob Bell)이나 故 레이첼 헬드 에반스(Rachel Held Evans) 같은 작가들이 퍼뜨린 신종 보편주의, 감정적 조작, 그리고 그 밖의 교활한 가르침들은 지난 수십 년간 복음주의가 맞서 싸워야 했던 거대한 도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시며, 좌파든 우파든 그 어떤 형태의 죄악과 우상숭배에도 결코 감동하지 않으신다.

보수적이고 표면상으로는 정통해 보이는 복음주의 내부에서도 학대 스캔들과 온갖 형태의 썩어 문드러진 부패가 요즘 들어 더욱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좌파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필자의 직무 유기일 것이다. 오늘날 소위 기독교를 표방하는 '신우파(new right)' 사이에서 필자와 많은 관찰자들이 점점 더 뚜렷하게 목격하고 있는 것(노골적인 쇼비니즘, 역겨운 반유대주의, 교리적 교만)은 완전히 배격해야 할 도덕적 오물이다. 끔찍하게도 한때 변방에 머물렀던 이런 사상들이 이제 주류로 편입되고 있다. 이 디지털 시대에 현장의 상황은 참으로 순식간에 변한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단 하나의 소망

이번 주 초, 필자는 부당하게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렸던 그 메노나이트 목사와 통화하며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품위 있게 대답했다.

"우리는 소망을 우파나 좌파에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좌파나 우파의 어리석음을 볼 때 그것을 대충 묵인하고 넘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진 명령은 모든 원수를 이기시고 생명의 말씀을 가지신 '그분' 안에 있는 소망과 지혜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 자체가 그 '예수님의 길'을 명확히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시대에 이보다 더 시의적절하고 지혜로운 말은 없는 듯하다.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