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교권보호국’을 상상하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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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우 목사(세인트하우스평택)
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요즘 드라마를 보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 화제가 된 웹툰 원작 드라마 《참교육》은 교권이 무너진 학교를 배경으로 국가기관 ‘교권보호국’이라는 상상 속 조직을 등장시켰다. 법과 제도가 해결하지 못하는 폭력을, 더 강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서사다.

처음엔 과장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왜일까. 그 박수는 드라마를 향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향한 절망의 박수였다.

한 교사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학생의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학부모의 민원 폭탄이었다. 교실은 더 이상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증거 수집의 공간이 되었고, 교사는 교육자가 아니라 감정노동자가 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는 ‘괴물 부모’를 말한다. 자기 자녀만 보호하면 된다는 과잉 보호, 교사를 서비스 노동자로 보는 소비자적 시선, 내 아이의 점수와 감정이 정의의 기준이 되는 시대가 이런 부모를 낳았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교실에서 권위는 해체됐지만 책임은 배우지 못했다. 자유는 넘치는데 절제는 없다. 권리는 배우는데 의무는 배우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가르친다고 했지만, 사실은 소비주의를 배운 셈이다.

‘참교육’은 원래 좋은 뜻이었다. 권위주의 교육에 맞서 인간다운 교육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 현장에서는 ‘권위 해체’만 남고 ‘교육 질서’는 약화됐다. 권위주의는 분명 문제였다. 그러나 권위 자체가 악은 아니다. 민주주의 교육은 교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권위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지금 학교를 보면 때로 교도소와 닮았다. 닫힌 건물 구조, 획일화된 시간표, 똑같은 교복, 차이를 지우는 급식 시스템, 위험을 이유로 줄어드는 수학여행과 현장학습. 아이들은 점점 세상과의 접촉을 잃어간다.

더 심각한 것은 ‘일진 문화’다.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압도한다. 폭력은 교사의 지도보다 빠르고, SNS는 교칙보다 강하다. 교실 안 질서는 법이 아니라 힘의 논리로 재편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참교육》의 교권보호국은 판타지가 아니라 대중의 무의식이 되었다. “누군가 대신 정리해줬으면 좋겠다.” 왕따와 학폭, 괴물부모와 좌절교사. 마약의 온상과 유통 등.

하지만 이를 해결하는 방식이 폭력이어서는 안 된다. 폭력으로 지킨 질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민주사회에서 이상적인 교육은 세 가지를 회복해야 한다. 첫째, 교사의 권위를 법이 아닌 신뢰로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 전문성과 인격이 필요하다. 둘째, 부모는 교육의 소비자가 아니라 동반자로 서야 한다. 셋째, 학생에게 권리와 함께 책임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이다.

John Dewey는 “민주주의는 삶의 방식이다.”라고 했다. 학교는 그 삶의 방식을 배우는 첫 번째 사회다. 그러기에 교사는 지식만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마지막 공적 어른이다.

우리가 ‘교권보호국’을 상상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현실의 교육이 그만큼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교권을 보호할 것인가, 아니면 교육 자체를 다시 세울 것인가.

정답은 분명하다. 교권 회복은 목적이 아니다. 공교육 회복을 위한 출발점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법봉이 아니라 신뢰다. 통제가 아니라 관계다. 처벌이 아니라 공동체다.

《참교육》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폭력이 아니다. 붕괴된 관계의 풍경이다. 교육은 결국 한 문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학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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