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당시 나는 수필과 시에 푹 빠져 있었다. 당시 ‘한국 수필 문학의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세 분이 있었다. 서울대 김태길 교수, 연세대 김형석 교수, 숭실대 안병욱 교수, 바로 이 세 분이다. 그중 나는 연세대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을 제일 좋아했다. 다른 두 분은 벌써 세상을 떠났지만, 김 교수님은 106세인 지금도 건재해 계신다. 수필가이신 아버님 서재엔 김 교수님의 수필집이 가득 꽂혀 있어서 즐겨 탐톡했다.
세상에 많은 글들이 있지만, 김형석 교수님의 글만큼 탁월한 글은 여태 보지 못했다. 수정같이 맑고 보석같이 영롱한 그의 찬란한 글은 외국어로 번역만 제대로 했더라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도 남았으리라 장담한다.
당시 나는 수필뿐 아니라 시도 즐겨 읽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이다. 그의 시 「진달래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이다. 그 내용을 소개해 보자.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놓인 그 꽃을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이 시가 특별한 이유는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시인은 울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이 말 속에 가장 깊은 슬픔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이 시를 단순한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떠나는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절제된 사랑의 노래’, 그리고 한국인의 '한(恨)'의 정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시인은 절망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마음 한편에서는 포기하지 못하는 상태로 보인다. 그래서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나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당신이 나를 기억해 주기를”,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주기를” 바라는 희망이 서려 있음을 본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김소월의 이 시 내용이 누가복음 15장 세 번째 비유에 나오는 소위 ‘탕자의 비유’와 연결되는 듯해서이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는 아들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다. 유산까지 챙겨서 보내 준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이들 중 다수는 둘째 아들이 탕자가 된 것에 아버지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들 말한다. 유산 줘서 집 나가면 다 털어먹을 걸 알면서도 왜 잡지 않고 보냈냐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에 아버지의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얘기까지 한다. ‘아버지의 은혜와 이끄심’보다는 ‘둘째 아들의 의지와 결단’이 그를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함에 유일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기에,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제일 중요한 요소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이 비유의 내용을 잘 읽어보면 아버지의 역할은 기다리는 일 외엔 아무것도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비유의 한계’를 알지 못해서 나온 무지한 발상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성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비유에서 인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 천리안이 아니기에 알 수가 없다. 그저 매일 매 순간 아들이 오길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이 아버지가 뜻하는 하늘 아버지는 다 보고 계신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거지가 될 것을 다 내다봤기에 아들이 집 나가는 걸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둘째 아들의 마음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가? 절대 아니다. 아들이 집 나가는 걸 아버지가 막으려 했다면, 오히려 거부감만 늘어갈 뿐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결단했다. 아들이 자기 원하는 대로 아버지 유산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서 마음껏 살다가 보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자발적으로 아버지를 찾아서 다시 돌아올 것을 다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회개하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옴에 있어서 하늘 아버지 하나님의 역할이 전혀 없었다고 보아선 안 된다. 요 6:44절의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찾아간 일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역사였던 사실과 동일하게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인간의 자유의지’란 것도 하나님이 천국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들에게는 ‘제한된 자유의지’임을 놓쳐선 안 된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땅바닥에 기어다니는 어린아이가 자유의지로 하루 종일 좌우 여기저기 맘대로 다닐 수 있지만, 그 아이가 칼과 같이 위험한 물건을 집으려 할 때는 부모가 얼른 막아선다. 이게 바로 ‘제한된 자유의지’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자유의지라고 해서 무조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님에 유의하자.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역겨워 집 떠나고자 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유산까지 쥐여주고 맘대로 살아볼 것을 일시 허용한다. 하지만 아들은 그것이 불행임을 뒤늦게서야 알고서 자발적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인간 아버지는 그걸 내다보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도록 돕지도 못하지만, 하늘 아버지는 다 내다보시고 자신에게로 돌이키도록 도우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자. 이게 ‘복음’이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