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련되는 은이 될 것인가, 버려진 찌꺼기가 될 것인가: 정련자의 맹렬한 불꽃 앞에서

마이글 밴하우스. ©linkedin.com

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마이클 밴하우스의 기고글인 '인생의 시련이라는 불은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있다'(This is what the fires of life are for)를 6월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이클 밴하우스는 2015년부터 미시오 넥서스에서 사역해 왔으며, 2023년부터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그는 가나 현장 선교와 여러 선교단체의 운영 리더십, 지역교회 선교 목회, 가족 재단 운영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으며, 현재는 선교 단체와 교회 자문, 연구 사업 총괄, 조직 전략과 직원 개발을 이끌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교회 친구와 커피를 마시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좀 더 깊이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친구가 살아온 지난날과 지금의 자신이 되기까지의 숱한 굴곡들을 들으면서, 필자는 앞자리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을 이렇게 멋지게 빚어내기 위해 그 수많은 삶의 요소들이 어떻게 하나로 작용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서 절대 잊히지 않는 한 가지 강렬한 비유가 떠올랐다.

1990년대 후반, 필자는 미국 중서부의 한 정유 공장에서 6개월 정도 일한 적이 있다. 노동조합의 파업 기간 동안 주로 행정 업무의 공백을 메우는 역할이었지만, 관리직에 있던 우리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정유소의 기본 작동 원리를 의무적으로 배워야만 했다. 정유소에서 사고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끔찍한 재앙이니까.

정유 공장 옆에는 커다란 바지선에 실려 온 원유가 들어오는 운하가 있다. 원유는 검고 끈적끈적하며 진흙 같은 찌꺼기 형태를 띠고 있다. 이 원유는 펌프를 통해 퍼 올려진 후 다양한 부산물로 탈바꿈하는 마법 같은 '정제'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와 가열 장치들을 수없이 통과하는데, 일부 가열 장치에서는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맹렬히 타오르는 풀무불'처럼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다. 다니엘의 세 친구를 불 속으로 던져 넣던 군사들이 그 뿜어져 나오는 열기만으로도 타 죽었을 만큼 뜨거운 불꽃이다. 몇 미터 밖에서도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라,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그 문을 벌컥 열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원유는 펄펄 끓는 가열과 차가운 냉각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이 혹독한 과정이 끝나면 마침내 '휘발유'라는 맑은 부산물이 탄생한다. 그 시커멓던 찌꺼기가 얼마나 철저히 정제되었는지, 결과물은 마치 맑은 물처럼 투명할 지경이다. 사실, 정유 공장에서는 사람들이 휘발유를 물로 착각하지 않도록 일부러 색소와 냄새를 첨가한다. 한여름 더위에 지친 누군가가 주유소에 들렀다가 그것을 마실 물로 착각하고 들이켜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물론, 원유는 이 가혹한 정제 과정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리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정련의 과정을 향한 우리의 태도

정련(정제)은 하나의 과정이며, 우리의 삶이 어떻게 빚어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비유다. 우리가 이 단련의 과정을 거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가둬두게 되고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밸브가 잠겨 있거나, 가열 장치의 온도가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거나, 제때 냉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원유는 본래 의도했던 맑은 결과물이 될 수 없다. 무언가 다른 물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원래 목표했던 순전한 제품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필자를 당신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내기 위해 삶에 허락하신 그 수많은 연단의 요소들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피하고 거부해 왔는지 모른다. 50대 중반에 접어든 지금,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눈물 흘리며 겪어야 했던 그 숱한 시련들이 내 안의 교만, 오만, 무지, 무감각, 정죄함, 불친절함 같은 찌꺼기들을 녹여내기 위한 귀한 축복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힘든 상황을 제발 비켜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명확한 순복의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찌꺼기를 태워버리기 위해 허락하시고, 예비하시며, 치밀하게 설계하신 그 정련의 과정에 엎드리는 겸손한 태도 말이다.

은혜의 고갈: 구제 불능의 상태

예레미야 6장은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말씀 중 하나다. 16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이어지는 27~30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이미 너를 내 백성 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로 삼아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 그들은 다 심히 반역한 자며 비방하며 돌아다니는 자며 그들은 놋과 철이며 다 사악한 자라.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버린 은이라 부르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버렸음이라."

이 말씀이 너무 흥미로워서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야금학(금속을 다루는 학문) 용어로, 예레미야가 묘사한 이 과정은 '회취법(cupellation)'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납'을 불순물 제거용 희생물로 사용하는 고열 정련법이다. 정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납이 먼저 녹고 산화하면서 불순물과 결합하여 은에서 찌꺼기들을 쏙 끌어낸다.

그러나 위 본문은 철저한 '정련의 실패'를 묘사하고 있다. 풀무불이 맹렬하게 타오름에도 불구하고, 정작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이 떨어져 나가기도 전에 납이 먼저 전부 타버리고 만다. '놋과 철'이 원재료와 너무 깊이 뒤엉켜 있어서 분리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묵직하고 가치 없는 찌꺼기 덩어리뿐이다. 결코 은이 아니다. 이 금속이 "내버려진(버림받은)" 이유는, 모든 가능한 뜨거운 시험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부부터 철저히 가짜(불량품)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부르는 '야금학적 구제 불능 상태'가 될 때 일어나는 비극이다. 이는 우리가 직면한 시련, 즉 '불'이 더 이상 우리를 빚어낼 수 없는 임계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만과 아집 같은 불순물들이 우리의 마음과 너무나 단단히 융합되어 버려, 아무리 불을 가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는 딱딱한 상태 말이다.

이것은 이른바 '은혜의 고갈(exhaustion of grace)'을 보여주는 매우 뼈아픈 그림이다. 납이 완전히 타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경고, 희생적인 사랑 등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을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쏟아부으셨음을 의미한다. 찌꺼기를 끌어안고 타들어 갈 납(희생물)마저 다 소진될 때까지 말이다. 이 비극의 원인은 정련자의 기술이 부족해서도, 풀무불이 덜 뜨거워서도 아니다. 연기가 걷히고 났을 때, 그 자리에 마땅히 빛나야 할 '은'이 없다는 것이 진짜 비극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스스로에게 날카롭게 묻게 된다. "나는 겉으로는 매끄러운 은빛을 띠고 있지만 속은 놋과 철로 가득 찬 '위선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자칫 아무리 강력한 불길로도 더 이상 변화시킬 수 없는 단단한 불순물 덩어리로 굳어질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정련하는 자는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반면, 말라기 3장 1~4절은 이와 대조되는 아름다운 소망을 보여준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여기서 가장 가슴을 울리는 대목은, 정련하는 자가 불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결코 자리를 뜨거나 금속을 운에 맡긴 채 방치하지 않는다. 그는 맹렬한 불 속의 금속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금속을 꺼내야 할 정확한 타이밍을 지켜보고 있다.

예레미야서와 말라기서의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유연함(pliancy)', 즉 기꺼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녹아내리려는 마음의 태도에 있다. 예레미야서의 백성들은 고집스럽게 반역한다. 그들은 죄와 교만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너무나 깊이 동화시켰기에, 정련하는 자의 손길을 거부한다. 불은 똑같이 뜨겁고 정련하는 자도 똑같이 곁에 계시지만, 재료 자체가 녹아내리기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말라기서에서 정련은 형벌이 아니라 '성숙'을 향한 과정이다. 불 속의 재료들이 정련하는 자에게 너무나 귀장하기 때문에, 그는 자리를 지키며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함께 견딘다. 그들을 태워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산만함, 두려움, 교만이라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림으로써, 마침내 그 불순물이 걷힌 맑은 은의 표면에 정련하는 자 자신의 얼굴이 온전히 반사되어 비치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 필자는 어떤 자리에 서야 할까? 변화를 거부하며 버틸 것인가? 내 마음과 영혼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딱딱한 불순물 덩어리로 굳어지게 내버려둘 것인가?

이 세대의 풍조를 본받을 것인가, 아니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것인가? 그분께서 내 안의 찌꺼기들을 태워 내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릴 것인가, 아니면 그 추악한 불순물들을 끝끝내 움켜쥐고 있을 것인가?

지금 나는 삶의 어느 영역에서 고집을 피우며 정제되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스스로 변화를 차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연단의 불꽃을 기꺼이 끌어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

불꽃은 같다. 정련하는 자도 같다. 유일하게 달라지는 것은, '우리가 기꺼이 엎드려 순복하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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