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학대와 상처 입은 양들: 교회는 '진리'와 '긍휼'로 안아주고 있는가

티시 캐넌 작가. ©teasicannon.com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티시 캐넌의 기고글인 '교회 안보다 밖에서 더 위로받는 성도들: 조용히 깊어지는 위기’(The silent crisis: When wounded Christians find more empathy outside the Church)를 5월 2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티시 캐넌은 작가이자 강연가이며 ‘트루 컴포트(True Comfort) 팟캐스트’의 진행자이다. 그는 평생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향한 건강하고 지속적인 헌신을 세워가도록 돕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자연계에서 포식자들은 무리 중 가장 강하거나 안정적인 동물을 표적으로 삼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은 상처 입은 녀석, 고립된 녀석, 방향 감각을 잃은 녀석, 즉 이미 비틀거리며 제 한 몸 가누기조차 버거운 동물을 노린다. 취약함은 그들을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든다.

우리 인간에게도 이와 같은 원리가 종종 적용된다.

우리가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흔들릴 때, 우리는 기만과 혼란, 거짓된 사상에 훨씬 더 쉽게 노출된다. 그리고 '영적 학대(spiritual abuse)'만큼 사람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예수님을 대변한다고 믿고 의지했던 이들이 도리어 깊은 상처의 근원이 될 때, 우리는 방향을 잃고 환멸에 빠지며 철저히 부서지게 된다. 신뢰는 무너져 내린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 채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리고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우리는 위로와 이해를 갈망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받아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두 팔 벌려 환영해 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기꺼이 두 팔을 벌려 품어주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깊은 긍휼과 인내,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는 무신론자이고, 어떤 이는 동양의 신비주의나 세속적 인본주의, 혹은 완전히 다른 종교에 헌신하는 이들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긍휼과 친절은 그것이 어디에서 발견되든 진정한 미덕이며, 영적 학대에서 빠져나와 상처 입은 수많은 신자들이 정작 교회 안에서보다 세속적인 목소리들로부터 더 따뜻한 위로를 받은 것이 사실이다.

영적 학대에서 살아남았고, 같은 아픔을 겪는 수많은 이들과 그 길을 함께 걸어온 필자로서, 나는 그 세속의 품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끌리는지 너무나도 잘 이해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 믿었던 이들이 깊은 상처를 주거나, 도리어 의심과 침묵, 묵살로 일관할 때 우리가 겪는 혼란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진다. 신앙 밖에 있는 사람들이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큰 인내와 공감을 보여줄 때, 그 방향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고통 속에서는 우리를 가장 먼저 받아주는 품으로 당장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그 열린 품이 주는 위로가 아무리 진심 어린 것이라 해도, 그것이 '진짜 진리(what is actually true)'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또한 그 긍휼이 아무리 진짜라 해도, 그것이 '진리'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 고통의 순간에는 다원주의가 마치 구원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사상들을 나란히 두면서도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굳이 씨름하도록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을 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진리'다.

초기의 충격이 가라앉고 나면, 더 깊은 질문들이 남게 된다. 그 해답에 대해 무수히 많은 신념이 존재하겠지만, 그중 상당수는 서로 모순된다. 즉, 그 모든 것이 다 진리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거나, 아니면 부활하지 않으셨거나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은 존재하시거나 존재하지 않으시거나 둘 중 하나다. 이는 감정적인 선호도나 사적인 경험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현실에 대한 명확한 주장이다.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사적인 감정이나 주관적 선호에 근거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 무덤을 걸어 나오셨고,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라고 주장하셨던 그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하셨다는 '역사적 주장'에 바탕을 두고 있다.

트라우마와 깊은 환멸은 사람을 일종의 '정서적 생존 모드'로 몰아넣어, 두려움과 슬픔, 탈진이 신중한 이성적 판단을 압도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음(감정)뿐만 아니라 뜻(지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깊은 슬픔이나 배신감의 순간에, 산산조각 난 우리의 마음을 구원해 내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지성(mind)'일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을 뼈저린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어머니가 알츠하이머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 남동생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리고 23년간 섬겨온 교회를 권력의 남용으로 잃어버렸을 때, 셀 수 없이 여러 번 나를 단단히 붙들어준 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금 왜 이런 일을 하고 계시는지 그 뜻을 다 헤아릴 수 없을 때조차도, 나는 그분이 과거에 이미 '행하신 일'을 굳게 붙잡을 수 있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내가 '아는 진리' 사이의 바로 그 간극, 그 분명한 분별이 나를 표류하지 않게 지켜주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변증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부활과 같이 중대한 사건에 대한 증거는 결코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때 우리의 신앙을 닻처럼 단단히 고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진리가 없는 긍휼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반대로, 긍휼이 결여된 진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채 듣기도 전에 귀를 닫아버리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은 교회에 매우 깊은 우려를 안겨주어야 마땅하다. 상처 입은 자들에게 실질적으로 가닿지 못하는 진리는 아직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영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해 종종 두 팔을 벌리고 있는데, 교회는 너무나 자주 의심의 눈초리, 매서운 검증, 침묵, 혹은 불편함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피 흘리는 양들이 조용히 피를 흘리거나 혹은 서둘러 치유되기를 기대한다. 깊은 배신에 대한 지극히 당연한 반응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잡한 슬픔과 곤란한 질문들에 쉽게 인내심을 잃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많은 경우, 정작 상처를 입힌 가해자(지도자)들은 보호받고 변호받으며 그 자리를 유지하는 반면, 피해자들은 조용히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자로 낙인찍히고, 아니면 그저 두 번 다시 언급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땅히 대면하고 책임을 물어야 할 자들이 오히려 방패막이 뒤에 숨는 것이다.

상처 입은 신자들, 곧 그리스도 자신의 양 떼가 교회 안에서보다 교회 밖에서 더 큰 인내와 온유함, 공감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게 된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가 긍휼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이는 교회가 아파하고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딛고 설 단단한 땅을 찾으려 애쓰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반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상처 입은 자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상처의 근원이 다름 아닌 교회 자신이었을 때는, 이 말이 두 배로 더 진실이어야 한다.

성경은 인간이 미혹을 통해 곁길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고린도후서 11:3). 그리고 상처받고 방향을 잃은 사람들은 특히 그러한 미혹에 더 취약하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진리와 사랑 '둘 다' 필요한 것이다. 둘 중 하나만 있어서는 안 된다.

양 떼에 속한 모든 양은 궁극적으로 '목자장'이신 주님의 소유다. 언젠가 그분은 상처 입은 당신의 어린양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했는지 우리 모두에게 물으실 것이다. "그들이 부서지고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인내와 긍휼, 그리고 진리를 품고 그들에게 다가갔는가? 아니면 우리 자신의 편안함과 안위를 위해 그들로부터 섣불리 등을 돌렸는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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