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선택의 순간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선택을 붙들고 끝까지 걸어갈 때 증명됩니다. 믿음의 여정에는 확신과 의심이 함께 있습니다. 약속은 붙들고 있지만, 현실은 더디기만 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믿음의 분량만큼, 지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믿는 만큼 선택합니다. 이 '믿음의 분량'을 '신앙의 실력'이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실력이라고 하면 나의 수준이 드러나 부족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았기에 선택의 자리로 부름 받았고, 그 선택 앞에서 고민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가장 선한 길로 가고 싶지만, 현실은 여전히 나의 욕망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관계 맺지 않은 삶에는 이런 고민 자체가 없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추성은 - 나오미, 다시 이름을 찾다
인간이 고난 속에서도 변화 없이 머물지 않도록, 타인의 아픔에 눈멀고 귀먹지 않도록, 단순히 수동적으로 견디는 데서 벗어나 인간을 더 인간답게 만드는 생산적인 고난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조건 중 하나가 바로 언어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을 사회성이나 언어에 다시 묶어 두려는 것이, 어쩌면 고난에 대한 성찰을 회피하려는 건 아닐까? 고난의 본질적 경험 중 하나는 바로 그 비사회성, 곧 유효하고 견고하다고 여겨지던 관계들의 해체다. 고난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점점 더 고독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비극은 관계가 차례로 해체되고 개개인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되는 이러한 과정을 잘 묘사한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위대한 파라오에 맞선 봉기 속에서 살고, 억압받는 자들과 차별받는 자들 옆에 머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들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파라오에 동의하기란 쉽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십자가의 형상들을 못 본 척하기란 간단하다. 물론 더 이상 침울한 십자가를 중심에 두지 않는 신학을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비판받아야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금까지의 그리스도교와 결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중심에 십자가가 서 있는 현실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도로테 죌레 – 고난
세상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분으로 마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은 십자가에서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 기사 속에는 이미 십자가의 구원과 재창조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비추실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존재가 바로 여러분임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여기서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서 그분의 형상을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과 눈을 맞추며 대면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시선을 맞추고 그분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에 기꺼이 참여하신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한규삼 - 설교를 읽다, 예수를 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