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질 때 드러나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나는 누구인가?’(Who am I?)를 최근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커리어 초기에 필자는 몬터레이 베이를 내려다보는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 크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공간이었지만 한 가지 선물이 있었다. 바닷바람이 스며드는 작은 창문이었다. 한적한 오후가 되면 소금기 어린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고, 파도 소리는 공간 전체의 속도를 늦추는 듯했다.

6월의 어느 금요일, 필자는 한 남성과 상담을 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 쌓고자 하는 모든 것을 이미 이룬 사람이었다. 은퇴한 외과의사이자 교수였고, 학문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았으며, 경제적으로도 안정돼 있었다. 수십 년을 함께한 아내와, 존경하는 자녀와 손주들도 있었다. 말은 차분했고 태도는 절제돼 있었으며,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의 정체성은 규율, 지성, 성취로 단단히 빚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은퇴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60년을 함께한 아내가 말기 질환 진단을 받았다. 남은 시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 믿었던 미래는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그는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내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아니었다. 인지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우울에 빠진 것도 아니었다. 그는 ‘무너져’ 있었다. 기분이나 스트레스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자체가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이것은 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정신과적 진단의 문제도 아니었다. 정체성의 위기였다.

임상심리학자로 수십 년을 일하며, 필자는 이 학문의 한계를 존중하게 되었다. 심리학은 증상을 관리하고, 패턴을 이해하며, 고통을 견디는 기술을 익히는 데 매우 유용하다. 필자는 트라우마에서 회복하는 사람들을 보았고, 중증 정신질환이 안정되는 과정도 지켜봤으며, 상실 이후 삶을 다시 회복하는 이들도 함께했다.

그러나 심리학은 한 가지 질문에는 답하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그 질문은 힘이 있을 때가 아니라, 무너질 때 등장한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로?”\ 이 질문은 진단서나 치료 매뉴얼의 영역이 아니다. 영혼의 질문이다.

커리어 초반 10년 동안 필자는 정신과 병원에서 일했다. 그곳의 일은 긴박했고, 구체적이었으며, 생존이 최우선이었다. 환자들은 말 그대로 살아남아야 했다. 안정, 안전, 약물, 퇴원 계획이 중심이었고, 의미나 목적에 대해 성찰할 여유는 거의 없었다.

이후 외래 진료로 옮기며, 전혀 다른 종류의 고통을 보게 됐다.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풀려가고 있었다. 커리어가 끝나고, 결혼이 무너지고, 자녀가 독립하고, 몸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붙잡아 왔던 역할들이 사라졌다. 그 모든 것 아래에서,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 “이제 나는 누구인가?”

필자는 그 질문에 답하도록 훈련받지 않았다. 윤리적으로도, 특정한 답을 강요할 수는 없다. 심리학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정리하도록 돕지만, 무엇이 궁극적으로 참인지를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어떤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됐다.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주로 역할, 관계, 능력, 감정에 두고 있을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작동한다. 깨지지 않을 때까지는. 그러나 그 구조들이 무너지는 순간, 정체성도 함께 붕괴된다.

이것은 필자가 청소년 치료 프로그램에서 일할 때 이미 목격한 일이었다. 1990년대, 심각한 정서·행동 문제를 겪는 청소년들을 위한 주간 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당시의 청소년 하위문화들이 단순한 반항을 넘어 정체성을 제공하는 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았다. 외모, 음악, 언어, 태도까지 모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각본이었다.

이 문화들은 정체성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공급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절망, 소외, 고통의 미화에 기대고 있을수록, 그 대가는 컸다. 우울은 깊어졌고, 자해는 늘었으며, 유명한 죽음 이후에는 자살이 연쇄적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영향 여부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무언가를 얼마나 절실히 필요로 했는가였다.

오늘날, 정체성은 문화의 중심 전장이 되었다.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를 최고의 권위로 삼고, 진정성과 자기표현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듣는다. 이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억압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임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필자는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을 보아왔다. 정체성이 스스로 만들어진 것일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취약하다. 성과, 인정, 신체적 안락함, 내적 확신에 의존할 때, 그것은 상실과 고통, 모순을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무너질 때, 사람들은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지워진 것처럼 느낀다.

여기서 심리학은 한계에 이른다. 현대 문화는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험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내면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종종 자기기만적이다. 생각은 빗나가고, 감정은 서로 충돌하며, 욕망은 바뀐다. 진실하다고 믿었던 자기 이해조차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정체성이 오롯이 자기 자신 위에 놓일 때, 자아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떠안게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노력의 실패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기독교 신앙은 조용하지만 급진적인 선언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저자가 아니다. 우리는 창조된 존재다. 우리의 정체성은 만들어내거나 고립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의미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를 향해 말해진다.

이것은 심리적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몸, 마음, 성격, 역할, 관계는 우리의 일상을 분명히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를 규정하는 최종 언어는 아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누군가와 말하기도 전에 내면의 복도를 지나간다. 그곳에서 여러 목소리가 들린다: 몸은 피로와 통증, 노화와 질병을 상기시킨다, 생각은 걱정과 후회, 미완의 과제를 되뇌인다, 성격은 반복되는 패턴을 재생한다, 역할은 책임과 기대를 밀어 넣는다, 관계는 갈망과 실망, 상실의 두려움을 울린다. 이 목소리들은 모두 현실이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또 하나의 목소리를 제시한다. 그것은 부정도, 자기암시도 아니라 선언이다: 너는 단지 몸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다, 너는 생각에 갇혀 있지 않다. 너의 마음은 새로워질 수 있다, 너는 패턴에 묶여 있지 않다. 너는 변화될 수 있다, 너는 역할로 환원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자녀다, 너는 상처로 규정되지 않는다. 너는 완전히 알려졌고, 버려지지 않았다. 이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들을 지우지 않는다. 재배치한다. 지배하게 두지 않고, 맥락 속에 둔다.

정체성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정될 때, 고통은 의미를 말살하지 않는다. 상실은 여전히 아프고, 슬픔은 여전히 무겁다. 몸은 쇠하고, 관계는 실망을 준다. 그러나 정체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환경이 변해도 붕괴되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필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완성했을 때가 아니라, 자기 규정의 짐을 혼자 지려는 시도를 멈췄을 때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아왔다. 정체성이 성취에서 소속으로 옮겨갈 때, 무언가가 부드러워졌다. 불안은 힘을 잃었고, 수치는 권위를 상실했으며, 고통은 견딜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쉬움을 약속하지 않는다. 기초를 약속한다. 기독교의 주장은 이렇다. 우리는 더 깊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에게 알려짐으로 온전해진다. 의미를 발명함으로가 아니라, 받음으로 산다. 정체성을 확보함으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정체성 안에서 쉼으로 살아간다.

질병이든, 상실이든, 실패든, 혹은 조용한 성찰이든, 결국 우리 대부분은 몬터레이에서 그 환자가 던졌던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로?”

만약 정체성이 우리가 하는 일, 느끼는 것, 성취한 것 위에만 세워져 있다면, 그 답은 언제나 불안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가장 참된 말이 우리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하시는 말씀이라면, 정체성은 어떤 폭풍도 지울 수 없는 것이 된다.

그 가능성이 모든 싸움을 끝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싸움을 짊어지는 방식은 바꾼다. 그리고 때로는 다시 시작하기에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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