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조나단 파커의 기고글인 ‘아파테이즘(Apatheism, 무관심주의): 무신론도 불가지론도 아닌, 기독교 신앙에 대한 또 하나의 도전’(Apatheism: Not atheism, agnosticism but another challenge to Christian faith)을 최근 게재했다.
조나단 파커는 버지니아주 워싱턴대학교에서 기독교와 문화 분야의 겸임 교수이며, 컬럼비아 국제대학교의 겸임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다. 또한 그는 버지니아 북부에 위치한 다민족 교회인 예루살렘 침례교회의 담임목사로도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다른 신념 체계들과 달리, 아파테이즘(apatheism)은 하나의 정식 세계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자체에 무관심한 태도 혹은 자세에 가깝다. 아파테이즘은 기독교 변증이 반드시 다루어야 할 관점인데, 오늘날 기독교 신앙을 고려하는 데 있어 매우 흔한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이자 저자인 조너선 라우크(Jonathan Rauch)는 『애틀랜틱(The Atlantic)』에 실린 널리 인용되는 글 「그대로 두라(Let It Be)」에서 자신을 아파테이스트(무관심론자)라고 밝힌다. 그는 아파테이즘을 “자신의 종교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는 성향,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더욱더 신경 쓰지 않으려는 성향”으로 정의한다. 라우크는 아파테이즘을 단순한 ‘게으른 무기력’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사회학적 성취로 이해한다. 그는 2001년 9·11 테러 이후의 맥락에서 글을 쓰며, 역사적으로 종교적 열정이 분열과 폭력을 낳아 왔음을 지적하고, 종교적 열정이 길들여진 현상을 퇴보가 아니라 성취로 평가한다.
철학자 트레버 헤드버그(Trevor Hedberg)와 조던 휴자레비치(Jordan Huzarevich) 역시 라우크의 견해에 공감한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파테이즘은 유신론, 무신론, 불가지론과 구별된다. 유신론자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불가지론자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믿는다. 반면 아파테이스트는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헤드버그와 휴자레비치는 이른바 ‘존재 질문(existence questions, EQs)’이 왜 중요하다고 여겨져 왔는지를 설명하는 여섯 가지 일반적인 이유를 검토한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혹은 불신이 사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질문들을 진지하게 다룰 충분한 동기를 제공하지 못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러한 질문들에 집중해야 할 이유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 각각의 반론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실천적으로 중요하다는 서로 다른 이유를 제시한다. 그러나 다섯 가지 반론은 모두 실패한다. 여섯 번째 반론,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사후의 운명과 관련해 실천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더 유망해 보이지만, 여전히 중대한 난점에 부딪힌다. 이 반론의 성공 여부가 논쟁적인 만큼, 실천적 아파테이즘을 거부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지 역시 논쟁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 관점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헤드버그와 휴자레비치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만일 우리가 존재 질문들에 대해 내리는 답이 실천적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면, 그러한 질문들은 철학적 관심을 덜 받을 만하며, 그에 관한 논쟁 역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큰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아니므로 좀 더 가벼운 태도로 다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그렇다면 아파테이스트를 대상으로 한 기독교 변증에는 어떤 필요와 장벽이 존재하는가?
아파테이즘에 대해 연구해 온 목회자이자 학자인 카일 베시어스(Kyle Beshears)는 오늘날의 문화적 환경 자체가 이러한 신앙 태도의 확산을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네 가지 상호 연관된 장벽을 제시한다. 첫째, 논쟁화된 신념과 세계화, 둘째, 하나님 없는 실존적 안정감, 셋째, 산만함, 넷째, 자율성이다.
첫째, 베시어스는 찰스 테일러, 제임스 K. A. 스미스, 앨런 노블과 같은 사상가들을 따라, 세계화의 심화와 종교적 신념 및 문화적 다양성이 일상적으로 교차하는 현대 사회에서 신념이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피터 버거(Peter Berger)가 말한 ‘개연성 구조(plausibility structure)’의 압박을 떠올리게 한다. 매우 상이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다 보니, 기독교를 유일한 참된 신앙으로 믿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둘째, 과학의 발전, 세속주의의 확산, 그리고 물질적 풍요와 기술의 발달은 과거 역사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실존적 안정감을 형성했다. 찰스 테일러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 500년 동안 인간은 하나님이 세계에 개입한다고 믿었던 ‘마법에 걸린 세계(en-chanted world)’에서 벗어나,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의존 없이도 삶을 이해하려는 ‘내재적 틀(immanent frame)’로 중심축을 이동시켜 왔다. 베시어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사회가 스스로를 안전하고 잘 돌봄 받고 있다고 느낄수록, 하나님을 덜 중요하게 여긴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동기가 줄어들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점점 덜 관련 있는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베시어스에 따르면, 아파테이스트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바로 “하나님 없는 실존적 안정감”이다.
셋째, 현대 사회는 자족적일 뿐 아니라 점점 더 산만해지고 있다. 베시어스는 앨런 노블의 연구를 인용하며, “우리 문화의 지속적인 산만함이 존재와 진리에 대한 가장 깊고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죽음, 아름다움, 불안과 같이 복음을 위해 우리의 영혼을 찌르는 요소들은, 여덟 시간짜리 몰아보기 시청 한 번이면 쉽게 무뎌진다.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너무 바쁘기 때문에 인생의 가장 크고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묻는 일을 손쉽게 회피한다.” 이러한 “논쟁성, 다양성, 안락함, 산만함”의 토양 속에서 아파테이즘은 단지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번성한다.
넷째이자 마지막으로, 베시어스는 개인적 자율성의 최우선성이 아파테이즘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파테이즘이 존재하는 핵심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성찰은 필연적으로 삶의 방식과 정체성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데, 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무관심으로 자율성을 지켜낸다는 것이다. 이는 프랜시스 쉐퍼가 말한 ‘개인적 평안과 풍요의 우상’을 떠올리게 한다. 쉐퍼에 따르면, 개인적 평안이란 “내 생애 동안 내 삶의 패턴이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며, 풍요란 “끝없이 증가하는 번영, 곧 물건과 또 다른 물건으로 가득 찬 삶”이다. 이 둘이 절제 없이 추구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과는 양립할 수 없다.
이 네 가지 장애물인 논쟁화된 신념과 세계화, 하나님 없는 실존적 안정감, 산만함, 그리고 자율성은 아파테이스트를 향한 변증에서 핵심적으로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아파테이즘에 대한 예비적 평가
아파테이즘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관찰점이 있다. 첫째, 아파테이즘은 체계화된 신념 체계는 아니지만, 분명 하나의 신념이다. 베시어스의 말처럼, 아파테이스트에게 왜 하나님에 관심이 없는지 물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삶과 관련 없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옳은지 확인하기 위해 하나님에 관한 질문을 던질 가치조차 없다고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기독교 유신론이 역사적으로 세계, 특히 서구 문화와 사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둘째, 아파테이즘은 미덕이 아니라 지적·도덕적으로 해로운 태도로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타와 앤더슨(Tawa Anderson)은 “아파테이즘은 주의 깊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것들에 대해 충분히 신경 쓰지 않는 태만(acedia)과, 이성적 논증에 대한 혐오(misology)라는 악덕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폴 코판(Paul Copan) 역시 비판적으로 말한다. “영적·이성적·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아파테이즘은 암에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신경 쓰지 않는 것과 같다. 혹은 좋은 교육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와도 같다.” C. S. 루이스의 말은 이 문제를 정확히 짚는다. “기독교가 거짓이라면 전혀 중요하지 않고, 참이라면 무한히 중요하다. 기독교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은 ‘적당히 중요한 것’이다.”
셋째, 아파테이즘이 스스로를 진보로 여기는 인식은 루이스가 말한 ‘연대기적 속물주의(chronological snobbery)’에 해당한다. 이는 자신의 시대와 문화가 우월하다고 무비판적으로 믿고, 과거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루이스는 오언 바필드(Owen Barfield)의 도전을 통해 이러한 태도가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는 데 큰 장애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특정 신념에 대한 논증을 평가할 때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신념은 실제로 논박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어디서, 얼마나 결정적으로 논박했는가? 아니면 단지 유행처럼 사라졌을 뿐인가? 후자라면, 그것은 그 신념의 참과 거짓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점은 헤드버그와 휴자레비치의 논문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들의 글이 유신론 세계관이 제공해 온 객관적 윤리 체계나 삶의 객관적 의미에 대한 설명력을 세속적 모델로 ‘결정적으로’ 대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논점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기에 사소하거나(예: 기도 응답을 믿는 문제), 오해되거나 잘못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예: 유신론 없이도 윤리적 동기가 가능하다는 주장).
비유신론 윤리의 핵심 쟁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도덕적일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는 비유신론자도 도덕적일 수 있음을 인정한다. 진짜 질문은 자연주의가 객관적 도덕 가치와 의무를 설명하는 데 유신론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세계관인가, 아니면 기독교가 객관적 도덕 기준에 대해 더 나은 근거와 정당화를 제공하는가이다.
넷째,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재’로 이해할 가능성 자체는 도덕적·지적 감수성을 지닌 정신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주제이다. 이러한 질문을 아예 고려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인식 주체의 정서나 이성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질서와 민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시사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인간 생명에 거의 가치를 두지 않거나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인간 존재의 실제 가치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그런 경우 그 사람의 감정이나 지성은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대한 아파테이즘의 무관심은, 『인간 폐지(The Abolition of Man)』에서 루이스가 어린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루이스는 이를 우주와 인간 본성에 관한 객관적 가치의 교리, 곧 ‘도(道, Tao)’에 비추어 볼 때 자기 자신의 결함으로 인식했다.
이 관점에서 감정은 객관적 가치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올바르게 질서 잡힌 감정은 마땅히 승인되어야 할 것을 승인한다. 아담 펠서(Adam Pelser)는 이러한 관점이 철학과 심리학 분야에서 점점 더 지지를 얻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감정은 객관적 가치에 대한 지각과 유사한 경험이다. 지각 이론에 따르면, 감정은 감각 지각과 마찬가지로 옳거나 그를 수 있으며, 지혜롭고 덕 있는 사람은 적절한 도덕적·미학적 판단을 내릴 뿐 아니라 감정을 통해 세계의 가치를 정확하게 ‘보게’ 된다.”
루이스와 고대의 여러 사상가들은 문화와 종교를 초월해 감정이 본보기(exemplar)를 통해 길러질 수 있고, 길러져야 한다고 믿었다. 펠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학생들의 메마른 마음을 ‘관개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부정의, 집단학살의 비인간성, 베토벤 교향곡의 아름다움, 우주의 물리 법칙의 우아함, 인간 인격의 존엄, 우리 자신의 죄성,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분노, 도덕적 공포, 미적 경외, 경이, 사랑, 통회, 감사와 같은 잘 형성된 감정적 인식을 통해—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애정 결핍을 도덕적 결함으로 인식했던 루이스와 달리, 아파테이스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에 만족하며, 때로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무관심의 대상은 안셀무스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존재”라고 경외 속에 고백했던 바로 그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