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대표하는 그리스도교 영성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마지막 저서 <아바>가 국내에 소개됐다. 이 책은 <신비주의>(1911)를 통해 신비주의를 개인적 황홀경이나 병리 현상이 아닌 학문적 탐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언더힐이, 생의 마지막에 붙든 본문인 ‘주님의 기도’를 깊이 해설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출간된 이 유작은, 한 시대를 관통한 영성 사상가의 사유가 어디에 닿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언더힐은 영성의 대가로 불리지만, 그 여정은 단순한 내적 체험의 심화로 귀결되지 않았다. 초기에는 인간 의식의 최고 차원과 신비 체험을 방대한 문헌으로 탐구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관심은 성육신과 예배, 그리고 교회 공동체로 이동했다. 개인주의적 신비주의에서 공동체적 영성으로의 전환은, 언더힐이 이론가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 여기’를 살아낸 실천가였음을 보여준다. <아바>는 이러한 여정이 도달한 최종 지점이다.
이 책에서 언더힐은 주님의 기도를 기계적인 암송문이 아닌, 영혼을 형성하는 정교한 구조물로 읽어낸다. 주기도문이 ‘하느님의 영광’을 향한 전반부와 ‘인간의 필요’를 아뢰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초월과 성육신, 수직과 수평의 균형을 강조한다. 이는 초기 언더힐이 탐구했던 초월적 차원과, 후기 그가 헌신했던 일상과 공동체의 차원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녀는 기도가 인간 중심의 욕망을 강화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철저히 하느님께로 이동시키는 위험한 전환임을 분명히 한다.
특히 언더힐은 기도를 ‘안전한 위안’으로 소비하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그에게 신앙은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이며, 겟세마네의 공포와 골고다의 패배를 직시하는 용기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집필된 이 책에서 ‘용서’는 추상적인 미덕이 아니다. 침략자를 향한 분노 대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자연적 본성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힘임을 증언한다. 언더힐이 말하는 영광은 세상의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패배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는 모든 신학적 설명을 내려놓고 ‘아바’라는 가장 단순한 부르짖음으로 돌아간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작은 자아를 내려놓고 우주의 시작과 끝을 향해 내딛는 신뢰의 도약이다. 평생 신비의 심연을 탐사했던 영성가가 남긴 최종 메시지가 ‘어린아이의 신뢰’라는 점은 이 책을 더욱 숙연하게 만든다.
<아바>는 화려한 영적 체험이나 난해한 이론을 좇는 독자에게는 불편한 책일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심리적 안정제로 소비하는 시대에, 이 책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는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혹은 너무 멀리 왔다고 느낄 때, 언더힐은 다시 가장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그 자리다. 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위험한 기도가, 그가 남긴 마지막 영적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