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리처드 하웰 박사의 기고글인 ‘바람직한 기독교 민족주의는 바로 이런 것이다’(Christian nationalism done right looks like this)를 2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리처드 하웰 박사는 케일럽 인스티튜트(Caleb Institute)의 설립자이자 총장이다. 그는 1977년에 설립된 하나님의 복음주의 교회(Evangelical Church of God)의 의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공공장소에서 예수께서 동전을 들고 계신 장면을 떠올려 보라. 사람들은 예수께서 어느 편을 들지 지켜보고 있다. 질문은 단순해 보인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 합니까?” 그러나 예수는 이 질문을 충성의 문제로 바꾸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동전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것은 가이사의 체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이는 국가가 세금과 공공질서를 요구할 수는 있어도, 마음의 예배까지 요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정부가 진리, 양심, 이웃의 존엄처럼 하나님께 속한 것을 빼앗으려 할 때, 그것은 예수께서 직접 그어 두신 선을 넘는 것이다.
정착민이 된 포로들
성경은 신자들을 무기력하거나 냉소적인 시민으로 훈련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포로들에게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가정을 이루며, 그들이 사는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이는 인내하며 감당하는 공적 책임이다. 그리스도인은 멀리서 도시를 저주하라고 부름받지 않았다. 도시에 속하지 않았음을 기억하면서도, 그 도시의 선을 구하라고 부름받았다.
이 긴장은 그리스도인이 매일 살아가는 자리다. 우리는 출근하고, 관공서에서 줄을 서고, 투표하며, 학교와 병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동시에 어떤 정당이나 지도자도 메시아로 대하지 않는다. 이 균형은 어렵다. 그러나 정치가 소란스럽고 분노로 가득 찰수록, 이 균형만이 신실함을 지키는 길이다.
하늘 시민권은 탈출 계획이 아니다
바울은 신약에서 가장 오해받는 구절 가운데 하나를 기록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 많은 사람은 이를 “이 세상은 중요하지 않고, 나는 떠날 날만 기다린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고, 시민권이라는 언어는 분명한 공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식민지는 로마의 삶과 가치를 먼 땅에 확장하기 위해 존재했다. 즉 시민권은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빌립보 사람들은 “우리는 로마 시민이니, 언젠가 로마로 이사 가고 싶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자리에서 로마처럼 살고 있다는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다.
이 맥락에서 바울의 말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곳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민권은 여기에서 살아내도록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실제 이웃 속에서 예수의 다스림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 주도록 부름받았다. 돈과 권력, 말과 원수,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로 말이다. 이 생각을 요약하면 단순하다. 하늘은 예수께서 통치하시는 곳이며, 그리스도인은 땅을 버리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치유의 정의와 새 창조를 이루시기를 기다린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 정치는 사랑을 따른다
제국과 몰락의 시대를 살았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는 두 가지 ‘도시’가 두 가지 사랑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기 사랑에서 비롯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사랑에서 비롯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공적 삶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이 질서를 잃으면, 정치는 언제나 예배로 변질된다는 뜻이다.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면 우리는 “안전을 위해서라면 잔혹함도 괜찮다”고 말하게 된다. 교만이 지배하면 “이기기 위해서라면 거짓도 괜찮다”고 합리화한다. 민족 정체성이 마음을 장악하면 이웃을 위협으로 보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추상적이지 않다. 이는 진단 도구다. 나는 무엇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진리나 사람을 희생시키려 하는가?
‘거주하는 이방인’: 소속되되 소유되지 않기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은 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직설적인 표현으로 설명한다. “거주하는 이방인(resident aliens).” 목적은 튀어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다. 교회가 국가적 야망을 돕는 종교적 도우미가 되는 순간, 진실을 말할 능력을 잃는다.
그들의 주장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구호보다 교회의 예배와 실천을 통해 더 깊이 형성된다. 교회는 권력을 전혀 건드리지 않는 ‘착한 종교’로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나라는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를 존중할 수 있다. 그러나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공적 삶에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새로운 종교로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먼저 정직함이다.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문화의 언어보다 더 깨끗해야 한다. 세련되어야 해서가 아니라,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편”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소문을 퍼뜨리고, 선전을 즐기고, 거짓을 눈감아 주는 교회는 이미 영혼의 일부를 팔아버린 것이다. 예수는 거짓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다음으로 꾸준한 공적 책임을 실천해야 한다. 세금을 내고, 정의로운 법을 지키며, 신중하게 투표하고, 자신의 직업에서 성실함을 지켜야 한다. 공정한 임금, 안전한 도로, 제대로 된 학교, 정직한 치안, 깨끗한 물처럼 일상의 방식으로 도시의 선을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의 포로들은 투덜거림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신실하게 살아감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동시에 분명한 경계를 지켜야 한다. 국가가 예배, 궁극적 충성, 이웃의 비인간화, 혹은 불의 앞에서의 침묵처럼 하나님께 속한 것을 요구할 때, 그리스도인은 사도들의 말로 답해야 한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 로마서 13장은 폭정에 대한 허가증이 아니다. 이는 권위의 제한된 역할을 존중하되, 모든 권위가 하나님께 책임을 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부르심이다.
또한 교회는 공적 인격을 훈련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정치적인 행동은, 공포에 휘둘리지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희생양을 만들지 않고, 약자가 짓밟힐 때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배가 우리를 진리를 말하고 연약한 자를 보호하는 사람으로 빚어내지 못한다면, 그 예배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숭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웃을 사랑하듯 나라를 사랑하라. 교정을 포함한 충성으로, 맹목으로 변질되지 않는 희망으로 말이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 이 단순한 질서를 지킬 때, 그리스도인은 공적 삶에 온전히 참여하면서도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