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몸이 쇠약해질 때, 당신은 어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가?’(When your body is failing, where do you find your identity?)를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돈(Don)은 자신의 믿음을 숨긴 적이 없었다. 그가 치료를 위해 처음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부터 분명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었다.
“나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는 마치 오늘 날씨를 말하듯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 이 병이 무엇을 앗아가더라도, 나 자체를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는 아내 곁에 앉아 있었다. 초기 상담 동안 그는 조용했고, 주의 깊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치 수십 년에 걸쳐 ‘하나 됨’을 배워온 사람들처럼 함께 움직였다.
그날은 돈이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병명은 다계통위축증(MSA). 희귀 질환이며, 대개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 능력과 언어 능력을 갉아먹고, 삼킴, 방광 조절, 혈압, 심지어 호흡 같은 자동 신체 기능까지 무너뜨린다. 치료법은 없고, 진행을 멈추거나 되돌릴 방법도 아직 없다.
그들은 원래 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은퇴 생활이 막 시작된 참이었다. 이탈리아, 유타, 커피와 함께하는 느린 아침들. 그러나 대신 그들은 부드러운 의자와 열린 창이 있는 내 조용한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구원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돈이 말했다. “그냥 이 길을 함께 걸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떤 날들은 웃음이 멈추지 않아 눈물이 날 정도였다. 한 번은 돈이 식당에서 식사 중 카테터가 갑자기 빠졌던 이야기를 했다. “그냥 발사됐어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소변이 사방으로 튀었죠.” 아내는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 “우리는 물웅덩이 하나를 남기고… 아주 큰 팁을 두고 나왔죠.” 우리는 말도 못 할 만큼 웃었다. 그것은 부정이 아니었다. 시험을 거쳐 진짜임이 드러난 기쁨이었다.
다른 날들은 조용했다. 진실의 무게로 가득했다. 어느 날, 돈은 손자의 생일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침묵 속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아내는 몸을 기울여 그의 등에 이마를 댔다. 서둘러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함께. 조심스럽게. 마치 그것이 거룩한 것인 양처럼. 웃음과 눈물 사이, 몸의 무질서와 긴 침묵 사이에서, 더 깊은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돈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아픔과 경이로움, 그 무게를 그대로 짊어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익숙한 요소들로 쌓아왔다. 육체적 힘, 날카로운 지성, 의미 있는 일, 소중한 관계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원처럼 그를 둘러싸며 삶에 구조와 안정감을 주었다.
우리 대부분이, 자각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산다. 그러다 진단이 내려졌다.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렷하던 정신은 두려움으로 흐려졌다. 한때 안정적이던 관계들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압박 속에서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를 이루던 원의 요소들이 하나둘 약해졌다. 그가 그렇게 애써 붙잡아 왔던 정체성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 원이 무너지자, 깊은 공허가 드러났다. 성취, 역할, 활동 등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그를 지탱하지 못했다. 그런데 바로 그 풀림의 순간에, 예상치 못한 것이 나타났다. 돈의 정체성이 끝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참이었던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계발의 결승선에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항복의 가장자리에 서 계셨다.
돈은 절망 속에서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 부르심을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다만 마지막 몇 해 동안, 그 초대는 더 깊어졌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관리해야 할 프로젝트처럼 대하지 않았다. 고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사랑받는 것을 허락했다. 구속받고, 붙들리는 것을 말이다. 자기 시스템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무언가가 바뀐다. 정체성은 밖에서 안으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임을 알게 된다.
돈은 그 자리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근육은 약해졌지만, 영원한 것은 더 강해졌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그저 존재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뿌리내린 존재로서. 영원한 존재로서. 더 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깨진 원 안으로 들어와 안에서부터 그를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다.
몸은 쇠해 가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경외함으로 대했다. “아직은 내가 돌볼 몸입니다.”, “더 나은 몸을 받을 때까지는요.” 정신은 여전히 명료했지만, 더 조용해졌고, 더 평안해졌으며, 더 자비로워졌다. 성품은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그는 쉽게 용서했고, 잘 웃었으며, 필요할 때는 울었다.
아내는 모든 순간 그의 곁에 있었다. 단순한 간병인이 아니라, 충실한 증인으로서 곁에 있었다. “이 여인은요,” 돈이 숨이 가쁜 목소리로 한 번 말했다. “그 어떤 설교보다도 나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현실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두려움 없이 함께 걸어갔다. 그들의 결혼은 도피의 공간이 아니라, 현존의 성소가 되었다. 침묵 속에서, 쇠락의 어색함과 아름다움 속에서,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고 정련되었다.
돈은 더 이상 자신을 정의하던 역할들 부양자, 보호자, 결정권자 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역할들은 한때 그를 섬겼지만, 이제는 더 큰 것을 섬기고 있었다. 그의 한계조차 제자의 길이 되었다. 매일의 항복, 고난이 마지막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느리고 완강한 거부였다.
마지막 몇 주 동안 말은 거의 사라졌다. 숨은 얕아졌고, 시선은 흐려졌다가 다시 또렷해지곤 했다. 어떤 날은 그저 함께 앉아 있었다. 손을 잡고, 산소 호흡기의 소리와 침묵 속에서. 때로는 천국이 이미 방의 가장자리를 스치고 있는 듯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그 방에 가는 걸 늘 기다리셨어요.”
필자는 또 다른 진실도 말했다. “당신의 부모님은 제가 드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제게 주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어요.” 정말 그랬다 돈은 분노나 두려움 없이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쌓아 올린 것들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았다. 새롭게 된 것만을 가져갔다. 구속된 자아, 뿌리내린 존재, 마침내 가장 깊은 의미에서 온전히 자신이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이다.
우리 대부분은 인간성이라는 ‘작업실’을 평생 닦고 가꾼다. 정신, 몸, 성격, 역할, 관계들. 하나만 더 정리되면 단단해질 거라 믿으면서. 하지만 그 좋은 것들조차 정체성의 무게를 모두 감당하도록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금이 가고, 늙고, 실패한다. 그것이 기초라면, 삶이 무거워지는 순간 전체 구조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돈의 삶은 내게 단순하지만 완강한 희망 하나를 일깨워 주었다. 하나님은 재료를 낭비하지 않으신다. 작업실을 경멸하지 않으신다. 다만 그것이 목적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뿐이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잘 관리하도록 도와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이야기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립보서 1:6). 그 완성은 단순한 안도가 아니다. 변화다.
그래서 필자는 이 말씀으로 계속 돌아온다. 특히 삶을 보이는 것으로 재단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마다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린도후서 4: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