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갈급함이 결여된 나머지 정통적인 기독교는 오늘날 영적 침체를 맞이했다.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 천 명 중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다. 게다가 우리의 많은 영적 지도자는 그 작은 갈망의 불씨마저 억누르는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한다. 우리는 극단을 두려워하며 감당 못할 사랑과 감당 못할 믿음과 감당 못할 거룩을 갖게 될까 봐 지나친 열심을 피한다.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교제하는 순전한 기쁨을 얻고자 전부를 기꺼이 희생하는 성도를 볼 때 우리 마음이 용기를 얻는다. 그들에게 격려의 말을 보내고 싶다. 계속 기도하라, 싸우라, 찬송하라! 지금까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지금까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에 감사하되 거기에 머물지는 말라. 하나님의 깊은 것들 속으로 계속 들어가라. 구원의 더 깊은 신비를 맛보기를 힘쓰라. 우리의 발은 땅에 붙어 있으나 우리의 마음은 원하는 대로 높이 날게 하라. 적당한 수준의 영적 상태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냉랭한 영적 환경을 제거하라. 만일 우리가 ‘추구하기만 한다면’ 천국은 틀림없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이다.
A.W. 토저 – 신앙의 기초를 세훠라
모든 세계관은 사실 단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누가 왕인가? (Who is King?)”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언가를 섬기도록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왕좌를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면,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왕’으로서 선포하신 첫 메시지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 가라”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 즉 ‘카도쉬(קדוש)’라는 단어의 핵심 의미는 ‘도덕적 완벽함’ 이전에, ‘구별됨(Set Apart)’, ‘분리됨(Separation)’, ‘다름(Differentness)’입니다. … 우리의 거룩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 ‘소속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염보연 – 킹덤 인사이트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들은 거의 언제나 함께 자랍니다. 혼자 서 있는 나무는 거의 없습니다. 폭풍과 비바람 속에서도 서로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며, 숲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명 공동체를 이룹니다. 셔먼장군나무 역시 혼자였다면 2,200년의 세월을 버티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쿼이아 나무의 유일한 약점은 의외로 얕은 뿌리입니다. 그럼에도 수천 년을 버텨온 이유는 뿌리들이 사방으로 뻗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 나무의 뿌리가 다른 나무의 뿌리를 감싸며 서로를 붙들고 있습니다. 셔먼장군나무는 약 2,200년을 그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폭풍, 산불, 가뭄 속에서도 뿌리 뽑히지 않고 제자리를 지킨 그 ‘버팀’이 오늘의 위대한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진짜 믿음은 화려한 순간보다 꾸준히 서 있는 시간의 길이로 증명됩니다.
노창수 – 라떼 한 잔의 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