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한국 교회에 큰 복이다” (오덕교 횃불트리니티 총장)
“한국 교수가 지금까지 내놓은 요한계시록에 관한 대작(magnum opus)” (박형용 교수)
“’학문적 탁월성’, 그 자체의 책입니다. 당대 천재 포이스레스, 오스본, 카슨의 제자 답습니다” (이애실 생터 성경사역원 원장)
들어가는 말(서론)
“요한 계시록은 무서워요” “이단소리 들을까 설교를 꺼리게 되어요” “천년왕국의 신학적 논쟁들 식상해요” “솔직히 어렵고 난해하기에 자꾸 피하게 되어요”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때 안심하고 믿고 따를 좋은 주해(강해)서는 없을까요?” 이것은 평신도가 아닌 대다수의 한국 목회자/선교사들의 고민이다. 서평자도 지난 30여년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음을 고백한다.
“주석을 쓰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요 가장 귀한 특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구절 한 구절 가지고 오랫동안 탐구하고 묵상하며 받은 은혜와 축복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마치, 하늘의 비밀을 남모르게 들여다보는 특권을 누리는 것 같다 (중략) 카슨(D.A. Carson) 박사님은 오래 전 주석의 중요한 지침을 주셨다. 카슨 박사님께 받은 감화와 은혜는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카슨 박사님은 학문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성경신학적이며 경건한 주석을 쓸 것을 당부하셨다”. (p. 27, 김추성 교수의 저자 서문)
“이 책은 신학 논쟁의 미로에 갇히지 않고 미로에서 빠져 나와 환한 출구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특별히 김추성 교수님은 천재적인 신학자 번 에스 포이쓰레스(Vern S. Poythress) 밑에서 요한계시록을 직접 배운 제자로서 이 책을 썼기 때문에, 제가 기쁜 마음으로 강력하게 추천합니다”(권성수 목사)… 한국교회 신학계의 저명한 교수/목사 24명의 추천사가 화려하다.
<요한계시록 주해>(김추성, 킹덤북스, 2024,1,435페이지) 김추성 교수는 총신대학에서 교회음악을 전공, 총신신대원 졸업 후 도미하여 필라델피아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약학(Th.M), 시카고의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요한계시록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Ph.D)를 받았다. 당대의 요한계시록의 최고의 석학, Poythress교수와 D.A Carson 박사의 지도하에 요한계시록을 공부하였다. 2007년 이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한국복음주의신약학회 회장 역임. 저서: <요한 계시록 4-5장 연구: 구약과 묵시문학에 비추어>(애영 커뮤니케이션), <요한계시록 연구>(경건), <하나님의 어린양과 보좌>(이레서원) 등이 있다.
목차: 제1부 요한계시록 서론, 제2부 본문 주석 8장. 서평자는 1부 ‘서론’ 중 계시록의 해석학파/상징, 1장 프롤로그(1:1-8), 6장 어린양의 최후 승리(19:7-20:15), 7장 새 하늘과 새 땅(21:1-22:5). 마지막 8장 에필로그(22:6-21)를 들여다 보면서, ‘간단히(?)’ 서평 할 것이다.
1.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요한계시록은 ‘쉬운 책’이다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책! 무섭고 두려운 책! 오해가 너무나 많다. 지금도 요한계시록은 잘 못 해석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과연 두렵고 무서운 책인가?” 이런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선교사들도 계시록설교 하기를 꺼린다. 혹시라도 이단이란 오해를 들을까 몸조심한다. 사실상 계시록은 다른 성경에 비해 가장 도외시 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첫 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1:1). 요한계시록의 부제(副題) 선언이다.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기록하라’고 12번(1:19; 2:1,8,12,18; 3:1,7,14; 14:13; 19:9; 21:5)이나 친히 명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계시의 결정자(決定者)시며 또 계시 자체(自體)이시다. 계시록의 말씀을 읽고/듣고/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3절)고 하셨다. 그러나 교회는 오랫동안 이 책을 닫아 두었다. 그래서 온갖 이단사설이 요한계시록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이단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한국교회의 신학교 교수들/목회자들/선교사들은 책임이 너무나 크다. 솔직히 서평자도 큰 책임감을 느낀다.
1.1. 요한계시록은 사랑의 예수님이 친히 ‘기록하라’는 바로 그 말씀이다.
“요한계시록은 가장 읽히지 않고 들리지 않는 책이 되어왔다. 교회지도자들이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자 이단 교주들이 요한 계시록을 가지고 순진한 성도들을 미혹하였다. 주님은 친히 12번이나 기록하라고 하신 요한계시록을 더 많이 읽고/듣고/깨닫고/이해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요한계시록에는 다른 성경에 없는 놀라운 말씀이 많기 때문이다. 주님은 요한을 통하여 이 계시의 말씀을 온 세상 교회에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교회는 요한계시록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덮어 두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을 철저히 연구해서 가르치고 배우며 행하여야 할 것이다”(p. 123, 서평자는 저자의 이런 안타까운 호소에 큰소리로 아멘한다)
1.2. 요한 계시록은 ‘묵시문학적 옷을 입었지만’, 묵시문헌이 결코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지금까지 묵시문학(문헌)으로 소개되었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진 것이다. B.C 200-A.D 100, 신.구약 중간기에 발전된 유대문학의 독특한 양식, 묵시문학은 설화체(narrative framework)로 기록되었다. 묵시문헌은 ‘종말론적’/’이원론적’/’숙명론적’/’저자 익명(가명)’/’상징사용’ 5가지 특징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사실상 묵시문학처럼 많은 상징이 기록되었다. 이런 상징을 통해 박해와 위기 가운데 있는 신자들을 위로/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는데, 소망과 위로보다는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책으로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결코 익명으로 기록되지 않았고 사도 요한이 직접 보고/듣고/경험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계1:2, 20; 22:8). 초월적 세계를 경험하고 기록하였다. 이 같은 증거적(證據的) 성격이 당시의 묵시 문헌과 크게 다른 것이다. 묵시문헌은 외경(外經)과 위경(僞經)에 다수 포함되었다. 정경(政經)과 같은 권위를 갖지 못하며, 다만 당시 유대문헌으로 배경자료가 된다.(여기에 대해서, 서평자의 <성경, 나의사랑 나의생명>(국민북스, 2020) 참조하세요)
“간략하게 말해서, 요한계시록은 묵시 문학적 옷을 입은 선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둘은 서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요한은 당대의 문학적 장르를 차용하여 새로운 내용과 실제를 담아 그리스도의 계시를 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간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공존한다. 요한계시록과 묵시문학 간에 존재하는 공통점을 무시해서도 안 되며, 또한 엄연하게 존재하는 차이점을 배제해서도 안 될 것이다” (p. 53, 저자의 설명이 명쾌.상쾌하다)
2. 요한계시록 핵심 주제: ‘천년 왕국’이 아니, “사탄의 영원한 멸망과 어린 양의 승리”
요한계시록! 하면 먼저 우리는 ‘‘천 년(밀레니엄)/’천년왕국’을 떠올린다. 신학계의 오랜 논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사실상 ‘천년왕국 논쟁’은 요한계시록의 핵심주제가 아님에도 가장 중요한 주제로 오해되어왔다. 성경 66권 중에 계20장 외에는 다른 곳에 밀레니엄이 기록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칠 정도로 신학화 되고 교리화 된 것”(p.1105)이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등장하는 6번(2,3,4,5,6,7) ‘천 년’이 사용되었다. 계20장은’사탄의 멸망과 심판’(1-10)/흰 보좌 심판(11-15)을 다룬다. 요한계시록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승리’이다. 요한은 본문에서 사탄의 영원한 멸망을 극적이며 회화적으로 묘사한다. 이것이 신정론(神正論)이다. 본문의 핵심은 사탄의 영원한 멸망과 어린양의 최후 승리이다. 성경전체에서 사탄의 멸망을 가장 극적이며 장엄하게 선포한 내용이 본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비롯된 천녀기설 신학논쟁(전천년설(세대주의 전천년설.역사적 전천년설)/무천년설/후천년설)은 너무나도 확장되어 신학적 진영을 나누는 교리로 발전하였다. ‘전천년설’은 천년이 예수님의 재림후에 따르는 기간으로 본다. ‘무천년설’은 천년을 상징으로 해석, 문자적 천년을 존재하지 않다고 간주한다. ‘후천년주의’는 교회시대 마지막 때에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질 것을 믿는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유대인 중심의 천년왕국을 주장, 역사적 전천년설은 유대인 중심의 천년왕국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전부다.
계20:1-10의 천녀기설 신학논쟁은 무익하다. → ‘새로운 시각의 대안적 해석’이 필요하다
김추성교수는 각각 ‘천년기설들’의 장점과 문제점을 평가한 후에 각 천년기설에 적지 않은 취약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교회가 오랫동안 천년설 논쟁에 휘말리다 본문의 핵심주제를 흐려지게 되었음을 주목하였다. 이미지와 상징 용어들이 풍성한 본문을 근거로 거대한 신학적 교리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적절한 태도가 아님을 지적하며, ‘새로운 시각의 대안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요한계시록 20:1-10의 핵심 주제는 사탄의 영원한 멸망과 어린양의 승리이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연구와는 다른 관점에서 본문을 탐고하고자 한다. 본문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천년기설이 아니라, 사탄의 영원한 멸망과 어린양의 승리에 있다. 요한계시록 20:1-10은 신정론이 절정이 된다. 사탄의 패망과 멸망은 모든 심판의 절정을 이룬다. 사탄의 멸망은 모든 악의 모체가 제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p. 1109, ‘주석자의 최대관심’은 저자의 기록의도를 간파하는 것인데, 그것은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신정론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심판들(일곱인/일곱나팔/일곱대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신정론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백성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이 신정론의 핵심사상이다. 계시록의 모든 심판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주권아래서”/”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기독교종말론의 핵심을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완성되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4-5장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를 가장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총사령부/핵심부/심판의의 진원지가 계4-5장이다)
“모든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과 어린양이시다. 교회의 모든 열쇠를 가지고 계신분도 어린 양이다.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가진 분도 어린양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기록이요 역사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가 완성되는 날을 우리는 고대하고 바란다 (중략)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요한계시록은 두려움의 책 이라기보다 소망과 위로의 책이다.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은 박해가운데 있는 한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기록된 책이다” (p. 1114)
3. 모든 민족과 열방에 대한 선교를 강조하는 선교의 책
요한계시록은 구약과 신약 모든 계시의 절정이다. 구속사의 거대한 스펙트럼이 담겨있는 계시의 완성이다. 이 책에는 천국과 지옥의 복음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다. 요한이 받은 계시는 많은 백성/나라/방언/임금, 즉 모든 열방을 향한 말씀이다. 계시록 5-17장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표현들이 거듭거듭 강조되는 것을 보라!
5:9 각 족속, 방언, 백성, 나라/7:9 각 나라, 족속, 백성, 방언/10:11 많은 백성, 나라, 방언, 임금/11:9 백성들, 족속, 방언, 나라/13:7 각 족속, 백성, 방언, 나라/14:6 모든 민족, 종족, 방언, 백성/17:15 백성, 무리, 열국, 방언들 (pp. 455-456)
“요한계시록은 열방에 대한 선교를 강조하는 책이다. 선교라는 관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구속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진전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백성은 더 이상 어느 한 나라, 문화, 종족, 언어에 제한되지 않는다. 요한은 자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선민의식과 유대적 민족주의에 얼마든지 사로잡힐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이 모든 것을 뛰어넘고 있다. 요한은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있다” (p. 456, 솔직히 서평자는 선교학 교수로서 요한계시록에 각나라/족속/백성/방언이 이렇게 많이 언급됨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너무 송구스럽다. 부끄럽다. 선교의 주님께 죄송하다).
4. 새 하늘과 새 땅(新天新地): 21:1-22:5 → 새 예루살렘/새 에덴! 신자의 영원한 본향!!
요한계시록 21-22장은 신천신지(新天新地) 이야기다. 요한 계시록의 절정(絶頂)이요, 신약 전체의 절정을 이룬다.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 백성의 최고의 소망의 기록이다. ‘새 하늘과 새 땅’/’새 예루살렘’/’새 에덴’에 대한 장엄한 환상이 펼쳐진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예수쟁이의 영원한 본향! 이 땅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나그네이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찬290장) 이즘은 이 땅이 천국인지라, 이런 찬송을 더 이상 부르지 않는다. 오호통재라!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와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 된 곳. 사실상 그 실상을 상상하기 조차 어렵다. 그런데 또, 오호통재(嗚呼痛哉)라! ‘신천지’ 이단집단 때문에 이즘은 ‘신천신지’를 언급도 못하는 한국교회 서글픈 모습이다. 분통이 터져야 한다. 왜 한국교회는 이 지경이 되었는가? 계21-22장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말씀을 통해 바로 알아야 한다. 신천신지는 지금의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아니면 미래에 완성될 것인가? (갱신설과 완전 소멸론). 이런 신학적 논쟁에 빠져서 본문이 주는 엄청난 감동과 감격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계시에 대하여 보다 ‘균형 있고 성숙한 태도’가 필요하다. 현재의 피조세계를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세상이 어차피 망할 세상이니 새 하늘과 새 땅을 누워서 감 떨어지듯이 기다리며 현실을 도피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중략) 한편 과학적이며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미래성을 부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이러한 현상은 서구 신학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 현재성만 강조하다 미래성을 간과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이다” (pp. 1198-1199)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다. 새 예루살렘은 새롭게 된 예루살렘이며 새 창조가 완성된 곳이다. 음녀 바벨론과 대조된다.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가 완성된 곳이다. 죄와 사망과 모든 고통에서 자유로운 곳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곳, 하나님의 주권이 완성된 곳, 즉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p. 1207, 신천신지의 바른 이해가 절실하다)
새 예루살렘은 도성이며 또한 공동체이다. 계시록은 일곱 별의 비밀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계1:20). 곧 교회의 감추인 비밀을 말한다. 혹자는 신천신지는 천국을 상징하고 새 예루살렘은 신천신지 안에 있는 교회 공동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동일한 실체를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드러낸다(복합 상징법(mixed symbolism)이다) 구약 언약의 공식 핵심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전의 성취는 언약 공식의 성취와 연결된다(계21:3). 즉 성전 신학은 언약의 공식과 불가불리의 관계이다.
나가는 말(결론): 에필로그(22:6-21) “지금은 요한계시록의 황금시대”
“또 내게 말하되 이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왜냐하면) 때가 가까우니라”(22:10)
요한계시록의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와 주제적으로 병행되는 부분이 7개이다. 복을 선언함에 있어서(1:3, 22:7)/종말론적 긴박성(1:3, 22:10)/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 병행(1:8, 22:13)/재림이라는 주제(1:7, 22:7)/증거적 성격(1:2, 22:8)/서론과 결론 일치하는 표현(1:1, 22:6)/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계시(1:1, 22:6). 일종의 수미상관(首尾相關)인 셈이다.
한마디로, 요한계시록의 중요 주제들을 거듭.반복 요약하고 있다. 저자의 의도와 기록목적을 확증하고 있다.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 지라”(22:6) 이 표현은 19:9과 21:5에도 거듭 강조한다. 요한계시록의 신적권위에 대하여 재차 강조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의 총 결론이다. 마지막 장에서 3번이나 “내가 속히 오리라(7, 12, 20) 재림은 성경 전체를 매듭짓는 말씀이며 구원역사의 정점이며 완성이다. 재림의 임박성/긴반성을 강조한다. 정말 깨어있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전체는 공개되어야 한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두 본문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요한계시록을 더 많이 읽고 지켜야 한다(계1:3). 특히 설교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더 많이 가르치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교회가 이 명령을 순종했다면 한국에 이렇게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활개를 치지 못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이비교주들은 요한계시록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제멋대로 해석하여 순진한 추종자들을 미혹해왔다. 지금은 바야흐로 요한계시록의 황금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난제들이 있으나 이제는 건전하고 믿을 만한 학자들의 주석과 책들이 어느때보다 풍성하다” (P. 1352)
“요한계시록은 과연 어떤 결단과 행동을 신자들에게 요구할까?”(계시록요약 16개 교훈)
“요한계시록은 과연 어떤 결단과 행동을 신자들에게 요구할까? 요한 계시록에서 가르치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왕이시며 영원토록 다스리신다/인내하라/성도들은 증인의 삶을 살라/이기는 자의 삶을 살라/환난을 이기라/충성된 자가 되라/회개하라/처음행위를 회복하라/우상 숭배하지 말라/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라/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살라/영원의 관점, 천상의 관점에서 현재를 조망하라 그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라/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에 붙들리지 말라. 눈에 보이는 세계는 잠시미여 영원하지 않다/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눈에 보이는 이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이다/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믿음을 지키라” (pp. 1341-1342)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7가지 축복선언! (여기까지 읽은 서평 독자들께 선물로 드린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1:3)/”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14:13)/”누구든지 깨어 지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6:15)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19:9)/”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20:6)/”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22:7)/”자기 두루마리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라”(22:14).
서평후기
김추성 교수님은 총신대 신대원 동기 목사다. 금년(2025) 5월 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정년 은퇴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는 탁월한 성악가다. 독창회를 가졌고(2003) 2번째 앨범도 냈다. 독일/한국 가곡, 성가 등 음반 10개 내며 독창회 열고 싶어 한다. 김교수는 ACTS(아신대) 설립자이신 한철하(韓哲河, 1924-2018) 박사의 사위다. 부인은 한상화 박사(아신대 조직신학 교수). 그는 산기도를 즐기며 박윤선 목사님 처럼 ‘기도로 공부하는 학자’다. 요한계시록 주해서 행간에는 저자의 영성이 베어 흐른다.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는 중에 그는 사도요한을 생각하며 밧모섬에 가서 10일간 머물며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서평자도 첫 안식년 중(2007)에 밧모섬 사도요한 계시동굴에서 부산 수영로교회 권사(성지순례)팀과 함께 통성기도후, 대표기도를 하였을 때 신비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