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커크의 죽음 앞에서: 죽음의 현실과 보수주의자의 소명

마크 기니.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기니의 기고글인 ‘찰리 커크는 삶의 참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Charlie Kirk understood the true value of life)를 1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기니는 헤리티지 재단 디지털 프로덕션 부서에서 영상 제작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이 글을 매일 타는 통근 열차 안에서 쓰고 있다. 지금 집으로 향하고 있으며, 아내는 저녁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막 한 살이 된 딸은 “아빠”라는 말을 배우고 있는데, 필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렇게 불러줄까 기대한다.

그러나 찰리 커크의 딸은, 필자의 딸보다 조금 더 자랐을 뿐인데, 오늘 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필자는 그 소녀와 그녀의 가족을 생각한다. 찰리를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보수 진영의 대부분 사람들처럼 필자도 그가 터닝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의 공동 창립자이자 대중적인 얼굴로서 해온 일을 알고 존중했다. 그는 대학 캠퍼스에서 활동하며 기존 질서를 도전하고, “영원한 것들(permanent things)”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이제 그의 죽음은 우리 앞에 남았다. 그것은 영원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죽음은 가까이 다가와 있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는 낯선 감각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근대와 그 이전 모든 시대를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죽음의 근접성(proximity to death)이다.

인류 역사 대부분과 비교하면, 오늘날 우리의 직업은 안전하고, 식단은 건강하며, 구급차는 단 한 통의 전화로 달려온다. 수많은 기업이 우리의 불편, 불안, 문제들을 해결하는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우리의 정신은 수백 생애를 살아도 다 흡수하지 못할 만큼 많은 오락과 기분 전환거리로 채워져 있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요양원이나 병원에서 우리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채 마지막을 맞는다. 그러나 조상들은 언제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다. 의학은 원시적이었고, 오락이란 곧 서로의 존재였다. 그들은 할아버지와 아기, 그 사이의 모든 이들에게 집 안에서 직접 작별을 고했다. 삶은 언제든지, 고통스럽게, 예고 없이 앗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필자는 조상들의 조건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현대의 의학, 제조업, 통신 기술은 축하받아 마땅한 성취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여전히 죽는다. 단지 그 사실을 잘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우리의 죽을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문화는 넷플릭스, 소셜 미디어, 자기중심적 분주함으로 그 사실을 가리고 있다.

찰리 커크는 이 자기 기만적 무감각을 거슬러 섰던 사람이었다. 그는 며칠 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셨으니, 당신은 살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의식했던 사람이었고,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 또한 똑같이 그것을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보수주의자로서, 우리는 공적 삶의 선한 유산을 단지 우리 자신만을 위해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후 세대를 위해 지켜야 한다. 우리는 창조주께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만나지 못할 후손들을 위해 그 권리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책무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정치적 기초 속에 이미 새겨져 있다.

지금은 마치 미국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미국인으로서 우리는 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영원한 것들”을 마음에 두고 이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찰리와 그의 가족,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복을 내려 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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