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빌 데이비스 교수의 기고글인 ‘"의료적 안락사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믿는가?’(What do Christians believe about Medical Assistance in Dying?)를 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빌 데이비스 교수는 조지아주 룩아웃 마운틴에 있는 커버넌트 칼리지(Covenant College) 철학 교수이자, 리폼드 신학교(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철학 겸임 교수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2025년 6월 1일, 뉴욕타임스는 캐나다의 ‘의료적 안락사(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 제도를 다루며, 폴라 리치(Paula Ritchie)의 사례를 중심으로 긴 기사를 보도했다. 그녀는 수년간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과 싸웠고, 그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다. 성경적으로 볼 때, 폴라의 고통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죄로 인한 세상의 깨어짐 속에서 나타난 비극의 한 단면이다. 어떤 이는 이 타락의 영향을 남들보다 훨씬 더 깊게 경험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의료적 안락사 법을 반대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이런 고통 속에서 빠른 죽음을 ‘해결책’이라 여기는 이들에게 다가가 사랑으로 함께하고 귀 기울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
성경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친다(시편 24:1, 신명기 10:14). 하나님은 생명의 주권자로서만 생명을 거두실 권한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창세기 1:26–27)이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생명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전제로 의료적 안락사를 지지한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이 죽음을 원한다면 돕는 것이 오히려 자비라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 기사에 달린 대부분의 댓글 역시 이 논리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는 성경적 인간관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감
고통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짐이 된다고 쉽게 느낀다. 이런 순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의료인조차 치료 불능의 상황에서는 무력감을 느끼며, 오히려 ‘평화로운 죽음’을 돕는 것이 자비라고 착각할 위험에 빠진다. 그러나 성경적 사랑은 고통을 이유로 뒤로 물러서지 않는다.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삶의 작은 부분들을 함께 나누는 것이 곧 사랑의 실천이다.
기도하며 곁에 서는 것,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모두가 그들에게 살아 있는 위로가 된다.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셨고, 부활을 통해 고통과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증언하셨다.
인간 존엄을 왜곡하는 의료적 안락사
현대 사회는 자율성을 인간 존엄의 근거로 삼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됨이 존엄의 근거라고 말한다. 의료적 안락사는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지위에서 끌어내림으로써 결국 모든 사람을 비인간화한다.
기독교 의료인들뿐 아니라 많은 양심 있는 의료 종사자들이 의료적 안락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치유자로 부름받았지, 죽음을 돕는 자로 부름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학의 한계를 인정할 때
의료적 안락사 반대의 근거는 단지 신학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의학적 실천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치유하는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안락사는 의사를 치유자가 아니라 살해자로 만드는 위험이 있다. 이는 의학적 신뢰를 무너뜨리고 환자를 사람보다 문제로 보게 만든다.
의료적 안락사는 종종 ‘연민’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문제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끝까지 존중하며 함께하는 것이다. 가족과 공동체가 보여주는 사랑과 동행이야말로 의학이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인간에게 진정한 위로와 생명 붙들기를 가능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의료적 안락사는 인간의 존엄을 해치고 의학의 본질을 왜곡한다. 교회와 성도들은 단순히 법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사랑과 기도로 함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그들이 삶을 붙잡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