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의 노래(4) 은혜 갈망의 노래

오피니언·칼럼
설교
시123:1-4
이희우 목사

은혜 아니면 웃을 일이 없는 시대다. 하지만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손경민의 찬양인데 그는 이어서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고 노래하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과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죄다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였다고 노래했다.

맞다. 지금까지 산 것도 은혜지만 앞으로도 은혜만이 살길, 은혜는 성경의 주제이자 신앙의 정점이고,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다. 겪고 있는 고통이 너무 힘겨운 시 123편의 시인, 바벨론 포로 말기에 예루살렘에 돌아갈 수 없는 신세 한탄인지 귀환 이후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대적들로 인한 탄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은혜를 갈망한다. 『한 길 가는 순례자』에서 120편은 ‘회개’, 121편은 ‘섭리’, 122편은 ‘예배’를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했던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123편은 ‘섬김’을 중심으로 해석하고 적용했다. ‘현대인의 즉각성과 일회성 추구 성향’을 이 세상의 속성으로 분석하고 종교생활에도 최신판, 최첨단이 판치는 시대지만 우리는 ‘제자도와 순례자’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바른 지적이다. 우리는 일생을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평생 여정이 한 곳, 하나님을 향한 순례자로 살아야 한다. 시 123편은 ‘은혜 갈망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 본다.

눈을 들고

마태복음에 보면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은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6:22-23) 그러셨는데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1절),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 무심코 하늘을 바라본 게 아니다. 고된 순례길을 가던 시인이 하나님을 찾는 거다. 그의 입에서 기도가 흘러나온다. “하늘에 계신 주여, 저 좀 도와주세요.”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원수들과 적대적 환경에 둘러싸여 한숨 쉬며,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한 것, 물론 실망이 아니다. 그는 지금 소망의 눈으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본다.

네 절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시에 ‘눈을 들어’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를 바라본 거다. 종들의 눈같이, 여종의 눈같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들어’, 그의 눈동자에는 간절함이 있다. 사람이나 세력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시인은 초점을 하나님께 맞췄다. 유일한 희망이신 하나님께 집중했다.

2절은 비유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같이”, 매우 현실적인 비유다. 종들은 주인에게 매여 있는 존재, 주인이 먹을 것을 준다. 심지어 생명의 안전도 자유도 전적으로 주인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종들은 주인의 손짓이나 표정에 집중하며 산다.

종교개혁자 루터(Martin Luther)가 하루는 개에게서 은혜를 받았다. 식탁에서 고기를 먹고 있었는데 곁에 있던 개가 루터의 손이 고기를 집으면 그 고기를 향하고, 고기가 입으로 향하면 고기를 따라가며 정말 간절한 시선으로 오직 고기만 보는 것이었다. 식사 내내 그 모습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한 루터가 “오, 이 개가 고기를 바라보듯 기도할 수만 있다면!” 그랬다는 거다.

시인의 눈동자는 그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눈을 감거나, 외면하거나, 초점 없이 무기력하지 않다. 사람은 눈이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을 노리듯 뚫어질 듯 응시한다. 패한 자는 시선을 돌리지만 승리가 필요한 자는 눈을 부라리는 것, ‘호시우행’(虎視牛行)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호랑이처럼 예리하게 보고, 소처럼 우직하게 행한다는 뜻이다. 우리 눈은 맑아야 하고 빛나야 한다. 사태를 파악하되 좌절하지 않는 눈, 급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우직하게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눈을 들라. 그게 은혜를 갈망하는 자의 자세이다.

주님을 향해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시에 보면 “행복한 두 눈이여 그대는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부분이 있는데 맞다, 눈을 들어 보되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하다. 옛날에는 버스 터미널 화장실 같은 곳은 문과 벽에 낙서가 참 많았다. “왼쪽을 보시오” 그래서 왼쪽을 보면 “오른쪽을 보시오”, 오른쪽을 보면 “뒤를 보시오”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 “뭘 봐 인마!” 그런 낙서들이었다. 뭘 보고 사느냐, 누굴 보고 사느냐에 따라 진로가 달라지고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자기만 바라보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고, 주변만 바라보면 산만해지기 쉬운데 순례자가 눈을 들고 바라본 것은 위, 소망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 높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물론 하나님의 거주 공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왕, 창조주, 권능의 하나님임을 뜻하는 표현이다. 1절에서, “하늘에 계시는 주여”라고 했는데 ‘계시는 주여’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앉아계신 주여’, 왕권과 다스림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영원 전부터 계신 왕이신 여호와, 그분의 보좌가 하늘이라며 하늘을 바라본 것, 이게 시인의 믿음이다.

신학사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새롭게 부각된 적이 있다. 자유주의가 득세하던 20세기 초에 등장한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정통주의(Neo-Orthodoxy),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과 이성을 신뢰했지만 합리적이라는 인간이 선택한 것은 가장 야만적인 제1차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길이었다. 이게 자유주의의 한계였다. 칼 바르트는 1919년 즉각 이를 반박하는 『로마서 강해』를 쓴다.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비판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혁명적으로 선포한 책, 이 책이 독일 학계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이 놀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에 비유했을 정도, 이 책은 20세기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친 칼 바르트의 대표작이다.

칼 바르트는 이 책의 ‘서론’에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다”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잠잠해야 한다”고 했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오는 절대적 하나님의 명령 또는 계시에 순종하는 자일 뿐 스스로 어떤 윤리나 행동이나 철학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 맞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해야 한다.

자비를 구하며

사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그저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여야 한다. 시인은 ‘은혜 베푸소서’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한다.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2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3절), 이 ‘은혜를 베푸소서’를 새번역 성경에서는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번역했다. 예수께 나아왔던 병자들이나 맹인이 부르짖던 소리다.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이 간구는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에게 호의와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말이다.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거다.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축복이든 저주든 모든 것을 주관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인정,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이 있겠지만 권능자가 자신의 분노나 계획을 바꾸어주시길 간구하는 거다. 마치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린 패장처럼, 거지처럼 앞에 선 거다. 주권자의 결정 한 마디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며, 내 억울함이 해소될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는 거다.

고통당하는 순례자, 3절과 4절에서 역시 세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멸시,’ ‘조소,’ ‘멸시,’ 조소와 멸시는 한 개인을 향해 쏟아지고, 집단으로 확대되기도 하는 모욕과 수치를 주는 행위이다. 1절에서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사용하던 시인은 2절부터 슬며시 ‘우리’라는 1인칭 복수를 썼다. 나와 민족이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문제가 곧 민족의 문제였고, 민족의 고통이 곧 개인의 고통이었다. 순례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그래서 왕따당하고, 그래서 차별당하고, 그래서 조롱당한다.

유대인이 당했던 민족적 조롱 중 하나가 시편 137편에 나온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1-5).

시편의 찬양이지만 1970년대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보컬그룹 ‘보니 엠’(Boney M), 그가 ‘By the rivers of Babylon’이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불렀다.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 시편 137편 내용을 팝송으로 만든 노래, 슬픈 상황을 디스코 풍으로 불러 더 슬퍼지게 한 거다. “바벨론 강가에 앉아 우리는 슬퍼하네/ 시온을 기억하며/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우리는 슬퍼하네” 이걸 개사해서 “흘러가는 강 물결을 바라본다/ 나뭇잎 하나 살며시 띄워본다/ 물결 따라 정처없이 흘러간다/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을 거다” 그렇게 불렀는데 영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By the rivers of Babylon을 코믹하게 “다들 이불개고 밥 먹어”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성경을 대중노래로 부른 것, 드문 일이었다. 또 70년대였지만 현대에 불러도 어색하지 않게, 오히려 적절하게 현대인의 상처와 기도를 잘 노래했던 것 같다.

내용을 보면, 바빌론 제국에게 망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그들이 유브라데 강변에 옹기종기 모여 고국 시온의 영광을 생각하며, 신세를 한탄하며 눈물짓고 있다. 특이한 것은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2절), 시편을 찬양할 때 사용하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다고 했다. 바벨론 군인들이나 바벨론 사람들이 그 수금으로 이스라엘에 제일 유명한 노래를 불러 보라고 멸시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정복자의 통쾌함을 위해 시킨 모욕이고 조롱,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찬양하는 노래를 원수들 앞에서 조롱당하며 노래할 수 없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절), 그리고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네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5절), 연주를 안 해 손이 굳는 한이 있어도 할 수 없다는 것, 또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6절), 노래를 못하게 돼도 좋다는 거다. 하지만 아마 그 중에 노래를 부른 사람도 있었을 거다. 안 부르면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얼마나 서글펐을까? 이를 악물고 억지로 노래한 것, 찬양이 애절한 탄가가 되었을 거다. 시인은 이렇게 기도한다. “멸망할 땅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8절), 바벨론이 반드시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다. 결국 바벨론은 시인의 기도대로 메대 바사 연합군에게 BC539년에 멸망 당한다. 고레스가 점령하고 벨사살이 죽임당했다.

조소와 멸시는 현대 사회에서도 큰 사회적 문제이다. 집단 폭동과 집단 학살로 확대될 수도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 그 대상에게는 생명을 갉아 먹는 것 같은 고통이다. 그런데 순례자는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3절), “조소와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4절)라고 ‘넘친다’는 표현을 반복한다.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은 과다한 상태, 분노와 자괴감으로 가득 차서 생명이 죽어간다고,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거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이주민들이 멸시받는다. 고려인이나 조선족, 탈북민, 사회의 루저 계층을 향한 멸시가 사라져야 한다. 교회 심방 때 P권사와 J집사 두 분은 기도제목을 이렇게 적어서 헌금과 함께 냈다. “부족하지만 00교회에 다닐 수 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거룩한 00교회에서 손님이 아니라 주인 같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하여 주옵시고, 교인들 모두가 국적과 상관없이 서로 내 몸처럼 사랑하는 화목한 교회이게 하옵소서” 각각 기도제목을 A4 용지 한 장씩 써 오셨다. 감동이었다. 기억하라. 멸시와 조롱, 차별과 혐오의 말 한마디, 표현 한마디가 어떤 사람에게는 비수(匕首)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듣는 분이 계신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힘이 없기에 하나님께 호소할 수밖에 없는 분들의 탄식, 순례자의 노래는 모든 멸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자들의 은혜를 갈망하는 기도다. 하나님은 그들의 한숨과 기도를 들으신다. 그리고 멸시와 조롱은 하나님이 복수하신다. 하나님이 친히 한숨과 분노로 가득한 영혼을 위로와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실 거다. 순례자가 된 시인처럼 힘든 상황일지라도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자비와 은혜를 갈망하는 노래를 부르라. 반드시 은혜받고 활짝 웃게 될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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