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서 회심으로, 그리고 확신으로

[신간] 마커스 보그의 고백
도서 「마커스 보그의 고백」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반까지, 영미권 신학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마커스 J. 보그(Marcus J. Borg)다. 그는 신약학자로서 탁월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교회를 떠난 이들에게 다시 신앙을 말 걸 수 있는 언어를 제공한 ‘대중의 신학자’였다. 그가 생의 말미에 써내려간 마지막 책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그저 개인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로 하나님을 묻고 살아낸 한 신학자의 신앙적 유언이자, 오랜 여정 끝에서 정리한 ‘내가 진정 믿는 것들’에 대한 고백이다.

이 책은 보그가 70세가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서전적 회상은 아니다. 그가 ‘기억–회심–확신’이라는 세 단어로 정리한 구조는, 단지 보그 개인의 내면 여정을 넘어, 오늘날 신앙의 의미를 되묻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익숙한 종교 언어가 공허하게 공중을 떠다니는 시대, 보그는 “하나님”, “예수”, “믿음”이라는 단어들을 자기 언어로 다시 불러오며 그 단어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 말’이 되었는지를 증언한다.

보그의 신앙은 ‘고수’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기존의 신앙을 한 번 완전히 내려놓고, 다시 천천히, 그러나 더 깊이 신앙을 ‘다시 살아낸’ 인물이다. 그는 유년기의 순전한 루터교적 신앙에서 출발하지만, 대학 시절 성서비평, 진화론, 사회과학적 분석을 접하며 그 신앙은 해체된다. 그러나 그는 회의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디딤돌 삼아 더 정직하고 깊은 신앙의 길로 나아간다. 그에게 신앙이란 정답을 고수하는 태도가 아니라, 현실을 새롭게 보는 감각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엮어가는 생생한 여정이다.

보그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하늘 너머의 통제자’가 아니라 ‘이 땅에 현존하시는 신비’다. 예수는 단지 위대한 스승이나 종교적 위안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부르신 하나님의 현현이다. 성경은 무오한 법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과 해석이 누적된 ‘신앙 공동체의 이야기’다. 그는 신앙 언어를 다시 쓴다. 그리고 그 언어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되살린다.

특히 보그가 강조하는 ‘회심(conversion)’ 개념은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중요한 울림을 준다. 회심은 단지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외적 변화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과 아름다움, 정의와 불의, 죽음과 생명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되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 회심의 여정에서, 사람은 자기 삶에 확신을 얻는다. 보그는 말한다. “나의 확신은 나의 회심에서 흘러나왔다.”

그가 말하는 ‘확신(conviction)’은 독단이나 교리적 완고함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질문을 지나온 사람이 도달하는 고요한 시선이다. 이 확신은 흔들리는 시대에 뿌리 내리는 법을 가르쳐 준다. 보그는 말년에 이르러 더욱 단순한 언어로, 그러나 깊은 울림으로 말한다.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따른다. 나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

<마커스 보그의 고백>은 진보적인 신학자들의 입문서이자, 전통적 교리를 의심하기 시작한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손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이 책은 독자에게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믿는가? 그것을 당신의 말로 말할 수 있는가?” 보그는 우리 모두가 신앙을 ‘다시 말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신앙이란 외워진 문장이 아니라, 살아내고 깨달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단지 보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기억과 회심, 확신을 돌아보게 된다. 신앙은 결국 삶 전체의 언어이고, 이 책은 그 언어를 새롭게 말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의 용기 있는 안내서다. 의심하고, 부딪히고, 다시 일어나는 이들, 그럼에도 여전히 하나님과 예수를 말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오래 곁에 둘 수 있는 신앙적 동반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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