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G.T. 그로빈스키의 기고글인 ‘당신의 이해가 그것을 완전히 파악할 수 있든 없든, 칼빈주의는 진리이다’(Calvinism is true whether or not your mind can fully grasp it)를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칼뱅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개인의 구원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동시에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뱅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를 양립 불가능한 모순, 즉 역설(paradox)이라고 본다. 하지만 역설이 객관적 진리를 자동으로 부정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양자역학이다. 간단한 질문을 해보자. 빛은 파동일까, 입자일까?
놀랍게도, 답은 "둘 다"이다. 이는 '입자-파동 이중성'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는 빛이 입자처럼 행동하고, 다른 상황에서는 파동처럼 행동하는 것을 관찰했다. 이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과학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며 현대 양자물리학의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자연의 영역에 역설이 존재한다면, 영적인 영역에서도 유사한 현상을 접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칼뱅주의를 이런 역설 때문에 거부하면, 우리는 두 가지 귀중한 것을 잃게 된다. 하나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에 대한 경외심이며,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온전한 구원에 대한 위로이다.
첫째, 칼뱅주의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과 마주하게 한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거룩함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이시며, 그분의 길과 생각은 우리의 것보다 높다(이사야 55:8-9). 그러므로 우리는 유한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쉽게 규정될 수 있는 하나님은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에 불과하다.
또한 이런 이해는 우리를 경배로 이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선하심이 우리보다 높다는 사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이해보다 순종과 신뢰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욥처럼 고뇌하고 씨름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복해야 한다.
둘째, 이 역설을 부정하면 복음의 능력이 약화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지 않고 '택자'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복음의 초대가 공허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복음의 초대가 진정한 능력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의 용서뿐 아니라 믿음과 회개까지도 함께 확보해야 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나 자유의지론자들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어 구원의 가능성을 열었고, 나머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경우, 구원의 일부가 인간의 결단에 맡겨지게 된다. "나는 대부분의 일을 했으니, 이제 너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스스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고후 4:3-4, 엡 2:1-3). 복음을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죽은 심령을 창조적으로 변화시켜주셔야 한다(고후 4:6). 하나님께서 이런 구원의 능력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복음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께서 죄 사함뿐 아니라 믿음과 회개까지 모두 준비하셨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라. 15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고, 27절에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신다. 즉,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치신 양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믿음과 회개는 분명 인간의 의지로 행해지는 행위지만, 그것조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원에 포함되어 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믿음으로 십자가의 효력을 끌어낸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당신의 믿음을 사셨기 때문에 당신의 삶에 효력을 나타낸 것이다. 당신의 믿음은 십자가 덕분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이다! 우리의 영적으로 죽은 마음으로는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믿음까지 확보하셨기에, 모든 죄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 7:9에 따르면, 하나님의 택자는 아무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로마서 9장은 이 선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임을 말한다. 그렇다면 왜 누군가는 자신이 제외되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이 점에서 칼뱅주의적 복음 초대는 진실하다. 왜냐하면 그 초대 속에는 구원을 이루는 능력 자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력한 죄인이 자신의 연약한 자유의지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필자는 날마다 그 믿음조차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므로 단지 역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칼빈주의를 거부하지 말라. 오히려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방식과, 믿는 자를 확실히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