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영화 <킹 오브 킹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아서왕(King Arthur) 이야기에 흠뻑 빠져 있는 어린 아들 월터에게 ‘왕 중의 왕’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의 실감 나는 이야기를 통해 월터는 이천 년 전 이 땅에 온 진정한 왕 예수의 생애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 복음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그려내’
『킹 오브 킹스』는 신약성경 복음서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옮겨냈습니다. 예수의 일생을 알기 쉽고 친절하게 요약해서 설명해주는 것이 작품의 목표였다면, 성공인 것 같습니다. 창작물로서의 창의성보다 우직하게 성경 내용 자체에 집중한 점은 이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일 수도 있겠는데요.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라 친숙하긴 했지만, 이야기의 긴장감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요. 성경 구절을 거의 그대로 대사화한 몇몇 장면에선 케이블TV 등에서 익히 보아온 『더 바이블』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하더군요.
초신자나 불신자 혹은 어린이들에게 이 작품은 복음을 소개하기에 효과적인 ‘그림책’과도 같을 겁니다. 기독교에 대한 대중적 거부감을 완화시킬 수도 있겠네요. 미국에서의 흥행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어진다면 향후 기독교 콘텐츠의 제작을 촉진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죠.
작품의 미덕을 더 꼽아볼까요. 가룟 유다의 죄책감은 표현하면서도 그의 자살(마 27:5)은 그려내지 않은 점, 선혈이 낭자했을 예수님의 육체적 수난을 상세하게 묘사하지 않은 점 등은 단지 어린이 관객을 의식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을 볼거리로 삼지 않겠다는 연출자의 선의가 느껴져서 퍽 고마웠습니다.
◎ 소소한 아쉬움들
성경 그대로를 따라갔음에도, 성경과는 미세하게 다른 점이 간혹 눈에 띄더군요.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 박사가 ‘세 명’이었다고 특정한 점(마 2:1), 베드로가 자신의 칼이 아닌 로마 군인의 칼을 빼앗아 스승을 지키려 한 점(요 18:10) 등은 성경과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뚱딴지같겠지만, 아내 캐서린이 웃을 때 자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은 의아했습니다. 일단 그런 행동을 미덕이자 예의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동양권에만 있는 일종의 가부장적 관습일 테고, 더욱이 1,800년대 영국 여성에게서 보이는 모습은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큰 흠은 아닐 겁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비해 빌라도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은 점도 아쉬웠습니다. 불명예스럽지만 무려 사도신경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인물인데도 말이죠. 출세욕에 사로잡혀 진리를 외면한 그의 심리를 자세히 묘사했다면 더욱 맛깔스러운 이야기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더빙판의 경우, 몇몇 장면에서 대사가 또렷이 들리지 않는 기술적 문제도 있었지만 영화 보는 즐거움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었네요.
◎ 쓸데없는 걱정일까
예수님의 이야기를 성경 그대로 담아놓은 작품이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는 소식은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는데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성경 66권, 즉 글자입니다. 그림이나 음악, 그 밖의 다른 매체를 제쳐놓고 활자라는 매체로 말씀하셨죠.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 성경 자체로 복음을 알아가고 알려주는 방식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복음서를 거의 그대로 옮겼다는 점이 장점이자 올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기독교 애니메이션이 각광받는 것은 기뻐할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을 제쳐둔 채 영상이라는 비교적 손쉬운 방법만을 선호하는 현상을 촉진하지는 않을지 우려가 되기도 합니다. 활자 매체보다는 영상이 대세가 되어 버린 거스를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철 지난 잔소리에 불과할까요.
◎ 진심 담긴 연출
월터는 아서왕 이야기를 유난스럽게 좋아합니다.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본 딴듯한 장난감 칼을 애지중지하죠.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자, 아끼던 칼을 형제에게 줘 버립니다. 진정한 왕이란 칼로 세상을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희생과 사랑의 왕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죠. 예수님이 왜 ‘왕 중의 왕’이신지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호소력 있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시는 장면도 꽤 비중 있게 묘사됩니다. 굳이 말구유가 어떤 물건인지를 대사로 설명해줄 정도로 말이죠. 이 장면은 예수님이 겸손의 왕으로, 비천한 모습으로, 낮은 자들을 위해 오신 분임을 힘주어 웅변합니다.
월터는 아버지에게 용과 마법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라댑니다.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니까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보다 더 멋진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타이릅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몰려들지만,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은 무뚝뚝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내가 행한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요 6:26)이라구요. 예수님의 수많은 주옥같은 명언들 중에서 유독 이 말씀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줌은 관객들이 ‘현실 너머의 진실’을 보기를 바라는 연출자의 의도 때문이겠지요.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노골적으로 복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원죄와 엮어 설명하고자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펼쳐 보이고, 뜬금없이 물에 빠진 월터에게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구해주고 당신이 대신 가라앉는 장면들이란 이 작품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여실히 드러냅니다. 심지어 영화 말미에는 이 구절을 아예 대놓고 보여주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모두가 힘을 숭상하고, 어떻게든 힘을 가져서 그 힘으로 원하는 걸 얻고자 하는 세태 속에서, 낮아짐으로, 가장 무기력한 십자가의 모습으로, 희생과 섬김으로 ‘왕 중의 왕’이 되신 예수님, 한번 믿어볼 만한 분 아닙니까?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