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강해 7. 룻이 크게 웃다

오피니언·칼럼
설교
룻 4:13-22
이희우 목사

룻기를 시작할 때 룻기의 배경은 사사시대의 마지막 때라며 너무도 끔찍한 폭력과 타락으로 얼룩진 암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룻기는 빛나는 이야기라고 했는데 지금쯤은 누구든지 충분히 느꼈을 것으로 본다.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소소한 일상, 그것도 불행했던 한 가정이 아름답게 일어서는 이야기, 그런데 그 작은 사건을 통해 역사를 빚고 계시는 하나님이 드러난다. 어둠을 희망으로 바꾼,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은혜가 돋보인다. 룻기는 이제 룻이 보아스와 결혼에 성공하며 크게 웃는 해피엔딩(Happy-ending), 마치 고전이나 드라마, 또는 연극에서 보는 상투적 결말처럼 끝난다.

사람들이 새드엔딩(Sad-ending)을 싫어하기 때문에 억지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헤세드(חֶסֶד, 인애)와 파카드(פָּקַד, 돌보심)가 만든 해피엔딩, 어찌보면 엔딩이 없는, 마치 계절마다 사라졌던 꽃들이 다음 해에 피어나고 또 피어나듯 축복이 영원한 인생 역전 이야기가 된 것이다. 출발은 분명 비극(Sad-Starting)이었다. 하지만 기대대로 사랑이 맺어지고, 꿈을 이루는 역전 인생, 아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행복의 문이 활짝 열리며 성 안이 온통 웃음으로 가득하다. 행복한 결말, 서사시 또는 단편소설 같은 룻기의 끝부분에 룻이 크게 웃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나오미가 웃다

1장을 돌아보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가정이 이주할 때와 모압 땅에서 지내는 10여년 동안 나오미는 존재감이 없었다. 존재감은 ‘생명의 샘’ 같은 것인데 1장 내용으로 볼 때 아예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다. 1장 21절의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표현으로 볼 때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라는 이름 뜻을 가진 남편 엘리멜렉이 베들레헴의 유지였던 것 같은데 자신의 기업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할 때 부인으로서의 역할이 없다. 가부장제라서 그럴까? 어쩌면 그저 이름 뜻대로 인생을 ‘즐겁게’ ‘달콤하게’만 살았을 수도 있다.

나뭇잎 응축 끝에서 비로소 굴러떨어지는 이슬방울 같은 존재감, 그런 존재감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아들이 모압 여자들과 결혼할 때도 무슨 역할을 했는지 드러나지 않은, 가정을 이끄는 어머니의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두 아들마저 죽는다. 남자란 남자는 다 죽고 씨가 마르는 저주받은 듯한 기구한 운명, 완전 절망이다.

그런데 ‘생명은 상처에서 피어난다’고 했던가? 드디어 나오미의 존재감이 드러난다. 고향 소식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1:6). 그동안 투명인간처럼 살던 나오미가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being)을 깨닫는다. 거친 굴곡을 지나온 인생,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지난날 자기 삶을 채색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비록 세월이 흐르면서 책갈피에 넣어둔 사진처럼 색이 바래졌지만, 추억은 함께 끼워둔 네 잎 클로버처럼 말라서 바스락거리지만 ‘별에 부딛친 상처’로 여겼을까? 마치 ‘책갈피에 고이 접어둔 별의 파닥임’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결단한다. 힘겹지만 각성의 눈물로 너울질을 시작한 것이다.

체면을 생각한다면 할 수 없는 귀향, 그저 죽더라도 고향 가서 죽겠다는 단순한 결심만은 아니다. 마치 겨울이 깊을수록 존재감이 드러나는 ‘겨우살이’처럼, 아니 날이 차진 뒤에야 푸르름을 한껏 뽐내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고향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귀향을 결단한다.

하지만 막상 돌아오지만 나오미는 여전히 우는 인생, 1장에서 표현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고”(13절),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다”(20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21절)는 생각과 빈손으로 울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 곧 ‘달콤함’이라 부르지 말고, ‘마라’ 곧 ‘괴로움’, ‘씀’이라 부르라고 했을까?

그래서 1장의 분위기는 세 남자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식, 사별의 통곡과 눈물, 거기에 가난과 고독으로 침울하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끝없이 쏟아진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돌아와 보아스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며 나오미는 4장을 보면 장례식이 결혼식으로 바뀌고, 행복과 탄생의 축제로 회복된다. 사별의 통곡이 탄생의 기쁨으로 바뀌고, 조가가 축가로 전환된다.

이제는 존재감이 없던 여인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잃었던 불행한 여인도 아니다. 가난하게 새 출발했지만 풍요가 찾아온다. 고독한 여인으로 등장했던 나오미, 이제는 희열에 찬 행복한 여인이다. 4장 후반부는 회복된 나오미의 활짝 웃는 웃음소리가 가정의 통곡소리를 완전히 잠재운 최고의 해피엔딩이다.

아들로 인해 웃다

재판이 끝난 다음 보아스가 결혼을 정식으로 발표하자 동네 사람들이 두 사람을 축복한다. 좋은 동네다. 여기저기서 쑥덕거릴 수도 있는데 평판이 좋은 두 사람의 결혼이었기 때문일까? 온 동네가 다 복을 빌어준다. 아름다운 동네다. 우리가 사는 지역도 그저 살기 좋은 도시 정도가 아니라 서로 복을 빌어주는 살기 좋은 도시, 아름다운 도시가 되면 좋겠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다음 내용이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13절). 동네 사람들이 룻과 보아스를 축복한 것을 비교적 길게 기록한 것과 달리 결혼 생활에 대한 언급은 단 한 마디도 없이 바로 “임신하고, 아들 낳은 것”만 언급하고 끝이다. 단편소설로 본다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성경에서는 13절, 이 한 절이면 충분하다. 이것으로 미션 클리어(Mission clear), 룻은 이제 가문의 수치를 다 씼었다. 하나님의 헤세드(인애)와 파카드(돌보심)가 계속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부부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나? 거기에 아이의 웃음소리와 할머니 나오미의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면서 이 가정은 온통 웃음꽃 만발이다,

금방 동네에 소문이 퍼졌다. 소식을 들은 베들레헴 여인들이 몰려와 나오미에게 축하 인사를 한다.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14절). 정말 인심 좋은 동네다. 주인이 일꾼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복을 빌어주는 동네, 서로 좋게 말해주고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동네, 심지어 재판 때도 분위기가 너무 좋다. 함께하며 복을 빌어 준다.

그들의 축하 인사는 시작이 하나님 찬양이다. 14절은 “바루크 아도나이”(בָּרוּךְ אַדֹנָי), “여호와여, 우리의 송축을 받으소서”라는 뜻이다. 그들은 지금 이루어진 모든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수치스러움에서 벗어나고, 노년을 걱정 없이 살 게 된 나오미에게 보아스뿐만 아니라 오벳이 고엘이 된 것을 축하한다.

재미있는 것은 동네 이웃 여인들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4:17). ‘보아스의 아들’이나 ‘말론의 아들’이 아니라 마치 ‘나오미의 아들’처럼 표현한다. 고엘 제도 중 형사취수법에 따라 태어났으니 ‘말론의 아들’이 맞지만 성경이나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 부른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14절),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15절). 그 아들이 나오미의 고엘이 되었다는 표현이다. ‘네 생명의 회복자’ ‘네 노년의 봉양자’라 했다. 죽어가던 나오미의 생명을 살린 자, 나오미의 노후대책이라 한 것이다. 꿈꾸던 대로 이루어진 것, 이 아이는 나오미를 마라에서 나오미로 다시 돌아오게 한 ‘이름의 회복자’가 된다.

그동안 나오미의 고엘은 룻이었다. 그러다 룻을 통해 보아스라는 고엘을 얻었는데 이번엔 오벳이라는 고엘을 또 얻었다. 그 과정을 본 동네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룻을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라고 한다. 괴로운 세월이 태양에 눈 녹듯 모두 사라지고 밝은 미래가 활짝 열린 것, 태어난 아들로 인해 룻과 보아스가 웃고, 나오미가 웃고, 동네 사람들이 다 웃는다.

영원한 웃음이 되다

룻이 낳은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이 낳은 아들이 ‘이새’라고 했다. 그러니 오벳은 다윗의 조부, 그렇다면 룻이 보아스와 결혼하여 다윗 왕가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 아닌가. 모압 여인, 과부 룻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다윗 왕가의 선조가 된 것이다. 엄청난 보상, 엄청난 축복이다. 이방인 과부가 정통 이스라엘로 합류한 것, 유대인들에게는 탐탁지 않은, 족보에서 지우고 싶은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대 중심주의를 배격하고 이방인을 포용하라는 것, 이게 요나서처럼 룻기의 목적이다.

11절과 14절에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라며 기원하는 그 유명한 자가 다윗이다. 유다 왕조다. 그러니 오벳을 낳은 건 하나님의 구원사를 잇게 된 셈이다.

룻기는 1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다윗 조상의 족보를 나열하면서 끝이 난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18-22절).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받드는 족보다. 창세기 5장과 역대상 1:1-4절의 아담부터 노아까지 10대처럼, 또 역대상 1:24-27절의 셈부터 아브라함까지 10대처럼 10대를 기록하며 죽음 이야기로 시작했던 룻기가 출산 이야기로 끝난다.

말론과 기룐 대신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고통과 죽음의 시대를 넘어 희망과 생명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아이들, 이 족보가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다. 룻의 웃음이 큰 웃음이 되었다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또 시선을 끄는 것은 룻기는 마지막 단어가 ‘다윗’이라는 거다. ‘하나님은 나의 왕’이란 뜻의 엘리멜렉에서 시작한 룻기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 ‘다윗’으로 끝난다. 사실상 룻기의 마지막 구절인 17절도 ‘다윗’으로 끝나고, 22절도 ‘다윗’으로 끝나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이 족보는 ‘다윗’으로 끝이 아니다. 나오미의 생애가 끝나고 1000년이 지난 뒤 그의 가문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 결국 예수님까지 이어진 족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보아스를 통해, 그리고 다윗을 통해 실현되고,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것(마1:3-6),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마태는 아브라함의 14대손이 다윗이고, 아브라함의 42대손이자 다윗의 28대손이 예수님이라고 정리했다. 이 마태복음의 족보에는 룻기의 족보에서 언급되지 않은 다말, 라합, 룻, 이 세 이방 여인의 이름이 들어있다. 여리고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후 성경에서 사라진 이름이었는데 마태복음 족보에 등장한다. 가나안 정복의 일등공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한 것은 기적 같은 영광이다. 이 세 여인과 밧세바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라 사람의 족보에 올리기도 부담되는 여인들, 빼고 싶은 이름들인데 저들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올려졌다. 예수님의 족보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너무 좋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거다. 이름을 족보에 잘 남기기 위해 사는 것, 이게 우리 인생이다. 룻기에 피날레를 장식한 다윗, 성경에 유난히 그에 대한 찬양이 많다. 위대한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충실히 자기 역할을 다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왕이나 권력을 가진 자는 신성시되고 추앙받는다. 대부분 가문도 대단하다. 그러나 다윗의 가문은 소박하고 아름답지도 않다. 거대한 삶의 이념이나 이상이 이끌어간 것도 아니다. 그저 먹고살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은 룻과 나오미 두 여성에게 당한 늙은 노인의 이야기라고 혹평하지만 아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그래서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조의 조상 이야기로 성경에 올려진 것이다.

굳이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불륜을 저지르고 수습한 차원으로 볼 이유도 없다. 룻이 단순한 성적 유혹을 위해 접근했다고 보나? 아니지 않나? 보디발 아내의 노골적인 유혹을 뿌리쳤던 요셉처럼 보아스도 성적 유혹처럼 보이는 청혼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를 원한다며 축복해준 것을 볼 때 그들의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분명히 강조한다. 룻기는 하나님의 헤세드(은혜)가 흐르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이다.

마무리한다. 사사시대라는 암흑기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다. 그래서 룻이 웃고, 보아스가 웃고, 나오미가 웃고, 태어난 아기가 웃고, 동네 사람들이 웃고, 오고 오는 세대의 사람들이 웃는,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구원 드라마, 룻기를 마치면서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룻처럼 크게 웃는 행복 누리시기를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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