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아누파마 실라스의 기고글인 ‘비극이 우리에게 하루의 수를 가르쳐주고 사랑과 선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성찰’(A reflection on how tragedies can teach us the number of our days and spur us on to love and good deeds)을 최근 게재했다.
아누파마 실라스는 인도 푸네에 위치한 등록 비영리 단체인 바니타슈레이(Vanitashray)의 창립자이자 전무이사로, 현재 South Asia Without Orphans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많은 사람들이 최근 발생한 에어 인디아 항공기 추락 사고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저 또 하나의 뉴스, 이미 비극으로 가득한 세상에 더해진 또 하나의 참사일 뿐이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것이 깨달음의 종소리처럼 느껴졌다. 인생이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지, 얼마나 순식간에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영혼을 뒤흔드는 순간이었다. 예고도 이유도 없이 말이다. 필자의 마음에 남은 네 개의 이야기가 있다. 네 사람의 삶, 그리고 네 가지의 교훈. 이들은 필자가 시간을, 목적을, 은혜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 놓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그들은 수년간 영국으로 이주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늘 인생이 발목을 잡았다. 책임감, 지연, 불확실성. 마침내 그들은 떠날 준비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필자는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완벽한 타이밍을, 기분이 좋은 날을, 적당한 계절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시작하겠지.” “언젠가 변하겠지.” 하지만 때로는… 그 ‘언젠가’는 결코 오지 않는다.
두 번째 이야기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필자를 흔들었다. 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그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지만, 공항에 늦게 도착했다. 체크인 마감 시간을 놓쳤고, 탑승하게 해 달라고 애원하고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그녀는 분노했고 좌절했고 절망했다. 그러나 그녀는 몰랐다. 그 지연이 곧 하나님의 보호였음을. 그녀는 늦었기에 살았다. 필자는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순간,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하셨을 때 내가 화를 냈던가?” “얼마나 많은 닫힌 문 앞에서 좌절했지만, 사실 그 문은 내 생명을 살리고 있었을까?” 때로 하나님의 “아니”라는 대답은 은밀한 자비의 다른 이름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생존자의 이야기였다. 비행기는 두 동강이 났고, 한쪽은 불길에 휩싸였지만 그가 있던 쪽은 아니었다. 그는 멍한 상태로 걸어나왔다. 하지만 살아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운’이 아니다. 그것은 목적, 섭리였다. 그의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필자는 전도서 3장 1절 말씀을 떠올렸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우리가 여전히 여기 숨 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네 번째 이야기.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였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가족이 있었고, 꿈이 있었고, 그날 아침 누군가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나왔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필자는 깨달았다. 우리는 내일을 약속받지 못했다. 오늘 밤조차도.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랑하기를 미루지 말자. 사과하기를, 용서하기를, 꿈꾸기를, 도전하기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삶을 살기를 미루지 말자.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순간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가진 전부다. 그리고 그것은 거룩하다. 시편 90편 12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또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린도후서 6:2)
그러니 필자는 스스로에게, 그리고 혹시 이 말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말한다. 지금 살자. 지금 사랑하자. 지금 용서하자. 지금 말하자. 왜냐하면, 때로는 ‘다음 기회’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