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말론 드 블라시오 작가의 기고글인 ‘대사명은 오늘날 현실적인가?’(Is the Great Commission realistic in our modern times?)를 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블라시오 작가는 문화 옹호자, 기독교 작가, 그리고 '문화를 분별하다'(Discerning Culture)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19-20). 이 명령은 흔히 ‘지상 대명령’이라 불리며, 예수님께서 우리와는 매우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신 말씀이다. 오늘날 현대 사회는 진보적 이상, 과학적 지식의 강조, 그리고 고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방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명령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
필자는 기독교적 제자도가 여전히 인간 존재의 충만한 요소라고 믿는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결코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신 있게 알 것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우리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얻은 자들”(베드로후서 1:1)과 함께 성장해 가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 삼는 사명을 수행할 때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황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서구 사상과 문화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형성되었고, 지적으로 풍요로워졌으며, 이제는 그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여기는 데까지 이르렀다. 역사가 톰 홀랜드는 그의 저서 <도미니언: 기독교 혁명이 세상을 어떻게 다시 만들었는가>에서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이렇게 풀어냈다.
“서구 사회에서 ‘선과 악에 대한 꽤 광범위한 합의’가 주로 기독교적 가르침과 전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양한 신앙과 무신론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거의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미국조차도, 기독교가 여전히 유럽보다 훨씬 활발한 영향을 끼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조상 대대로 이어온 기독교 신앙을 낡은 미신의 유물로 여기게 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현대의 기피 현상이 기독교 신앙의 찔림을 피하려는 의도적인 태도라고 확신한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신화를 해석하는 주간 세미나에서 누구도 마음을 찌르는 진리의 도전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순진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약 기독교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면, 왜 문화는 여전히 그 신념에 대해 그렇게 민감할까?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이 여전히 치열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실존적으로 실제임을 시사한다. 제자도는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도록 북돋우는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과학이 발전한 세상에서, 2,000년 된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교양 없고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단어는 두려운 낙인이 되었다. 우리는 세련됨(sophistication)을 반(反)근본주의, 그리고 진보적 사고, 과학 지식, 기술 혁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인들도 모든 산업 분야에 종사하며 그들의 기여도 역시 그 어떤 이들 못지않게 정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물질적인 노력과 신앙 모두 여전히 인간 경험의 일부라는 점이며, 이 두 요소는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르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윌리엄 뎀스키는 그의 글 「과학과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양립 가능한가?」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신앙은 과학과는 달리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과학도 인간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그런 의미에서는 개인적이다. 그러나 과학은 세계에 대한 명제적 주장과 그 작동 원리를 기술을 통해 활용하는 데 초점이 있다. 반면 신앙은 중심 교리라는 명제적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인격적인 측면이 강하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무한한 인격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시간 직접적인 관계를 요구한다.”
우리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서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국적, 직업, 교육 수준, 재산, 경력, 운동 능력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성’이다. 예수님의 복음이 나에게 참된 소식이라면, 그것은 당신에게도, 내 이웃에게도, 당신의 이웃에게도 마찬가지로 참된 것이다. 주님이 나를 받아주셨다면, 그분은 당신도 받아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약속은 지금도 유효하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누구든지.
삶 속에서 제자도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실수는, 우리 공동체가 가진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데 있다. 모든 교회 공동체는 그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사를 찾아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는 재정, 인사, 선교, 구제 등의 여러 위원회가 존재하지만, 은사와 재능을 발굴하고 개발하는 위원회는 거의 없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은사와 재능을 우선시하고 이를 발전시킴으로써 제자를 삼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은사를 주셨다. 하지만 우리는 교회와 지역 사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는 많은 귀중한 재능들을 ‘땅에 묻어두고’ 있다.
제자도는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명의 떡”(요 6:33-51)을 맛본 자, “생수”(요 7:38)를 마신 자, “불법이 사함 받고 죄가 가려진 자”(롬 4:7)는 누구든지 제자도의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성장할 수 있도록 주어진 놀라운 은혜의 메시지이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참된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는 여정이다. 우리가 이 복음에 사로잡히고, 인간 존재가 여전히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Plus ça change, plus c’est la même chose.” 즉, “변하면 변할수록 본질은 그대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탁월한 지성을 통해 놀라운 세상을 만들어냈지만,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렘 17:9).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사상적 도전을 이겨내며, 여전히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용서와 평안, 기쁨을 제공하고 있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신화나 미신은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한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7). 믿는 이들 모두가 대사명의 실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