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은 말 할 것도 없이 루터다. 칼빈의 업적은 성경의 구원관을 교리적으로 체계화 한 공로가 있다. 그러나, 주로 연구실 중심이었다 할 수 있다. 반대로, 복음을 사회현장에 강하게 이끌어 낸 신학자는 단연 존 웨슬리다.
첫째, 그는 성령신학 곧 영성신학을 주도했다 할 수 있다. 그의 성령운동이 그가 영성신학자인 것을 증명하고 있다. 죄의 회개와, 회개하는 자에 대한 용서에 대한 이론을 확립하여 선재 은혜을 바탕으로 한 신인협동설을 주장하였고,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경건의 훈련을 쌓는 일로 복음부흥을 일으켰다.
둘째, 그의 복음은 사회현장 중심이었다. 부패한 인간정신과 사회현상을 복음, 즉 성령운동으로 개조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가난한 그룹들을 찾아가 하나님 나라 메시지로 위로했으며, 육신이 병든 자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치유하는 사역을 활발히 했다. 나아가, 미국 조지아 사바나에서 선교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영향을 받아 로버트 레이크스(Robert Raikes/1736–1811)는 흙먼지 나는 거리에서 뒹굴던 아이들을 모아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말씀선포, 전도로 바로 그와 같은 현장사역을 했다. 그렇게 웨슬리는 사회복음으로 영국인들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사회질서를 확립하는 일을 했다.
웨슬리의 신앙정신을 이어 받은 감리교는 한국에 들어와 선교했을 뿐만 아니라, 무지몽매한 무속신앙에 빠져있던 조선인들을 보고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교육에 힘썼다. 중고등학교를 세우거나 대학교를 세웠던 것이 그 예이다. 또, 어느 교단 선교사들은 병원을 세워 질병치료로 삶의 질을 개선해 주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한국이 교회부흥은 물론 사회전체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말씀전파만 했기 떄문이 아니라, 복음을 사회영역에까지 크고 넓게 확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사회복음을 처음 주도했던 목사는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1861-1918)이다. 그는 침례교 목사로서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복음은, 예수의 복음이 가난하고, 병든 환자, 연약한 저변층을 대상으로 하였던 것처럼, 미국 산업화가 한장 발전하던 시기의 노동자, 극빈자, 경제적 혜택으로 부터 소외된 자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공기가 순환되지 않는 지하실에서 각종 소모품 생산에 종사하는 자들, 또는 12시간이나 되는 긴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신앙생활을 돌보는 그런 목회를 했다. 그런 계층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전했는데, 얼마나 최선을 다하여 목회를 했는지 그의 삶 말년에는 귀병(귀머거리)을 얻기까지 했다. 이러한 사회복음 운동으로 라우쉔부쉬는 한때 신학계, 일반 사회, 정치계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라우쉔부쉬는 20세기 사회윤리 신학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의 신학이나 목회는 사회복음의 모델이 되었다.
성결교단, 또는 그 계통의 교단들은 21세기에 참으로 좋은 신학적 조건을 가지고 있는데, 사중복음의 전도 표제가 바로 그것이다. 영적으로 어지러운 때 중생의 체험, 정신이나 도덕적으로 필요한 성결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와 타락이 심한 이 즈음 새로운 인간에로의 거듭남이나 성결한 삶은 얼마나 사회에 긴요한 신학이나 전도 슬로건인가! 나아가, 신유는 어떤가? 치유는 인간육체나 영적질병, 정신적 질병의 치유, 혼탁한 사회환경의 치유, 사회질서의 치유 역시 시급하게 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신학적 요소다. 고독, 소외로 인한 인간상실, 풍요로움 속에서의 물질적 결핍, 그에 대한 정신적 빈곤, 가치관의 혼란, 모두 신학/목회적 치유대상들이다.
이렇게 목회 대상적 요소들이 현실사회에 넘쳐 나도록 많은데 교단은 전도표제로서의 사중복음을 신학화 하지도 않고, 적용하지도 않고, 실행하지도 않는다. 감추어진 보물로만 여기고 있다. 나타내 보여져야 하고, 좋은 영적, 정신적 품목으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니 사중복음의 가치를 외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사중복음의 이론화나 사무실용 표제를 넘어 사회복음으로 가는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사회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사회적 영역, 또는 사회적 현장에 직접 행동화로 전파, 확대를 말하는 것이지 복음을 사회학 이론이나 사회 정치적 이념, 철학과 연합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이런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또한, 성결교단은 신유의 전도 모토가 있으니, 영적 치유를 넘어 인간 육신의 질병까지도 치유의 범주안에 넣는 작업을 해야 한다. 교회가 할 수 있으면 아동 보육원이나, 생활상담소를 운영하는 것도 그 일부가 된다. 좀 더 적극적인 포부가 있으면 교단차원의 병원을 세우거나 복지관을 세우는 그런 일을 해야 된다. 성결교단 이름으로 대학병원을 건립하여 이익 창출이 목적이 아닌 교단 전도를 목적으로 운영하는 그런 대 사회 프로젝트를 세워 사중복음의 실효성을 한국뿐 아니라 세계에 알리도록 해야 한다. 교육, 복지, 의료 같은 것을 통한 간접적 전도를 해야 할 것이다. 마침, 교단 신학교인 서울신학대학교는 사회복지학과도 있으니, 그리고 교단 내에는 복지에 대한 전문가도 있을 것이니, 그들을 동원하여 사회복지관 건립이나 운영같은 것을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큰 컨벤션 회의장을 건립하여 꼭 기독교 그룹을 위한 것만이 아닌 국내는 물론, 국제회의도 열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 교단의 영향력 행사를 하는 것도 사회복음의 일면이 될 수 있다.
복음은 앉아서 기도만 하는 그런 소극적 현상만을 말하지 않는다. 복음은 다양한 계층, 환경, 인류 모두를 수용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하나님은 그런 요소들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무심한 습관같이 말로서만 외쳐 의미를 내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몇주 전, 교황 바오로 2세가 카톨릭 언어로 선종했다. 대대로 교황들은 늘 가난한자들, 질병에 시달려 고통받는자들, 거처없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기도해 주고, 그들의 생명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높여 주는 일들을 했다.
교황도 그러한데, 한국개신교 목사들, 특히 크거나 유명하다고 불려지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어두운 거리로는 나가지 않고, 대신 권력자들과 함께 어울리고, 먹고 마시는 것에 행복해 하는 그런 행동들을 하고 있지 않는지 스스로 돌아보길 바란다. 부와 권력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으시고, 힘들게 사는 약하고 소외된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반대되는 행보를 하고 있는 한국교회 대형목사들이 혹시 없는지 되묻고싶다. 이런 행태들에 대하여 불신앙의 사람들 마저도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다 판단하고 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지금도 사회복음 운동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 성결교단은 초대교회와 존 웨슬리가 체험했던 불같은 성령충만에서 오는 개인적인 성결을 뛰어 넘어 대 사회복음 운동으로 발전할때, 세상 사회로부터 지지를 받고 훌륭한 교단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1~2)
#양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