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기 한경직의 건국신학 연구: ‘전도입국론’을 중심으로(3)

오피니언·칼럼
기고
김일석 박사(임마누엘교회 담임, 장신대)

B. 목회적 기여

김일석 박사(임마누엘교회 담임, 장신대)

한경직은 전도입국론을 통해 교회 안팎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주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첫째, 해방을 맞아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설교하여 남한 사회에서 민주주의 국가 수립의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였다. 둘째, 교회를 세우는 것이 곧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 여겨 건국론을 선교론으로 치환하여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했다. 이를 통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론을 창출하여 이후 세워지는 교회의 모범이 되었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성을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셋째, 교회성장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했다. 전도를 통한 건국운동은 필연적으로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한국교회는 1960년대 이후로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C. 신학적 한계

1. 성경주해의 빈곤함

명암(明暗)이 없는 신학은 있을 수 없듯 한경직의 전도입국론 역시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선 「건국과 기독교」에 수록된 27편의 설교 가운데 구약성경을 본문으로 삼은 것은 3편에 불과할 정도로 지나친 신약성경 편향성을 보여준다. 이는 한경직의 목회관이 바울의 칭의론에 입각하여 전도를 목표로 한 주제설교로 경도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는 결과적으로 예언자적 국가관으로 편만한 구약의 말씀이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자의적 목적에 의하여 성경본문을 다루는 아이제게시스(eisegesis)적 방법으로 인해 성경은 결국 수단이 되고 정작 해방정국이라는 역동적인 현실에서 역시 성경말씀은 희석되고 만다.

2. 낙관적인 인간론과 낭만적 역사관

정교분리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경직은 건국과 민주화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환원(reduction)시켰다. 곧 전도를 통해 교회가 많아지면 민주주의 역시 자연스럽게 뿌리 내릴 것이라고 낙관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은 한경직이 기대한 것과 같이 교회의 규모와 영향력이 결정한 것이 아니요, 토론과 합의를 통한 절차적 민주화의 과정으로 진행되어온 것 역시 아니었다. 오히려 4·19혁명과 같이 한경직이 거부한 방식인 투쟁과 희생을 거치며 혁명적 민주화 과정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경직에게는 권력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과 죄악성을 간과한 낙관적 인간론과 더불어 교회가 나라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낭만적 역사관이 동시에 엿보인다.

3. 민주주의 이해의 빈곤함

한경직은 민주주의가 성경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성경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만을 인정하는 하나님나라 신학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 뿐 아니라 인간이 창안해낸 어떠한 이념이나 체제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많아짐으로 민주화가 촉진된다는 근거를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제시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최근 교회를 이탈하는 ‘탈교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이들이 교회를 가장 비민주적인 집단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와 같이 대의민주제 정체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자체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현실은 지극히 모순적이다.

4. 공교회성의 약화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에는 대의민주제로 운영되는 장로교회가 나라의 민주화를 가능케 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면 교회 내 정치원리가 장로교회와 사뭇 다른 교파들, 이를테면 감독제인 감리교회나 회중교회에 가까운 침례교가 많아진다면 민주주의의 발전은 더디거나 불가능한 것일까? 구 프린스턴 신학의 특징인 배타적인 신앙고백적 교회론의 모순을 보여주는 한경직의 신학은 해방정국 당시 특정 체제를 선택하고 배제하는 모습 속에서 서로 다른 전통과 예전을 갖춘 교회들의 다양성마저 용인하지 못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결과적으로 교회의 본질 중 하나인 공교회성(Catholicity)을 약화시키게 될 우려가 있다.

5. 곡해된 정교분리의 원칙

한경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일이란 “개인으로서는 가능하나 교회로서는 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완전분리와 상호불간섭을 강제한 것으로서 일제강점기부터 한국교회가 따르던 정교분리 원칙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가 한국교회에 일방적으로 규정한 정치 불간섭 행정 처분이었을 따름이다. 한편 개혁교회에는 정권의 불편부당한 대우에 저항하는 신학이 있었고 이는 서구의 정치철학에서 저항권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유구한 전통으로 존재해왔다. 한경직은 이를 수용하거나 계승하지 못한 채 일제강점기에 형성되어 정권에 유리하게 작동되던 정교분리원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해방 이후에도 고수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복적으로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6. 분단신학으로 기능

한경직은 전도입국론이라는 방법을 통해 세워질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야말로 장차 건국될 나라의 이상적 정체로 상정한다. 더욱이 공산주의를 ‘계시록의 붉은 용’으로 지목함으로서 신학적으로 실체화하여 공산주의와의 대화나 협력마저 단절시킨다. 오히려 십자군의 궐기를 촉구하면서 백색 테러를 긍정함으로 말미암아 냉전의 결과인 분단체제를 공고히 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결국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수립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념으로서의 공산주의와 체제로서의 북한을 배제함으로써 한 민족, 한겨레의 통일국가 수립이라는 명분이 무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서 남북의 분단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결과적으로 분단신학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VI. 결론

한경직은 해방 당시 서북 지역을 대표하는 목회자 가운데 한 명이었고 월남 이 후 영락교회를 창립하여 부흥시키며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해방정국에서 한경직이 견지하던 국가관 및 정교분리관 곧 교회와 국가의 상관성을 추적 하여 밝히는 작업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국가관의 원형을 탐색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해방을 맞아 한경직은 건국이라는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과제 앞에서 영락교회 강단을 통해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가 세워지기를 열망하는 설교를 행한다. 그러나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교회로서는 직접적인 정치운동에 나설 수가 없다고 생각한 한경직은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건국운동을 창안해내는데 그것은 바로 전도였다. “전도가 곧 최대의 정치운동”이라는 이른바 전도입국론(傳道入國論)을 확립하여 건국을 위한 교회의 방법론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대의민주제를 교회정체로 삼는 장로교회가 많이 세워지면 그 교회를 통하여 민주제도를 접하고 익힌 성도들이 사회의 곳곳에 포진하여 민주정신을 발휘하면서 새로이 세워진 나라 역시 자연스레 민주화된다는 논리였다.

한경직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체득한 지적이고 신학적인 배경에 기인한다. 한경직은 오산학교에서 서북 지역의 실력양성론을 익히며 개인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나라에 봉사하는 선적이고 점진적인 방법론을 깨우치게 된다. 숭실대학에서는 민족에 우선하는 교회를 터득하고 백만인 구령운동의 일환으로 전도대를 이끌며 순회전도의 경험을 쌓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는 구학파의 교회론을 계승하여 가시적 교회를 굳건히 세우고 확장시켜야 함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지적인 이력과 체험은 해방정국 시기에 건국이라는 시대적 사명 앞에서 전도입국론으로 발현되어 더 많은 교회가 민주주의 국가를 창출하게 된다는 논리로 전개되었다.

한경직의 이러한 건국신학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수립되는 기독교적 정당성을 제공하였고, 건국론을 선교론으로 치환하여 교회와 사회를 유기적으로 연결했으며, 교회성장을 위한 신학적 기틀을 마련하는 등의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경직의 방법론은 남북 분단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말았다. 따라서 한경직의 전도입국론은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신학적 스펙트럼이 이념에 종속되며 협소화되는 결과를 낳았고 장차 화해를 근간으로 한 통일을 지향하는 신학으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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