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남긴 복음서들이 치유와 빛을 주기를…”

선교
피터스의 제주도 탐방기 Ⅳ
정의현 객사의 주 기능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지방관이 임금에게 정기적으로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를 올리는 기능이며, 둘째는 중앙관리가 내려오면 이곳을 거처로 사용하는 숙소의 기능이다. (서귀포시 관광 안내 표지판 설명) ©지미 리

다음 날(역주: 1899년 3월 10일) 하늘은 다시 꾸물거렸지만 우리는 다른 날과 같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끈기에 대한 보상으로 좋은 샤워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정오까지 우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목적지인 정의(Chang-ni, 旌義)에 도착했다. 여기에도 주막은 없었고 우리는 다시 정의 현감을 찾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가 오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관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깨울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는 곧 짜증이 났고, 당직을 맡은 사람 중 한 명에게 현감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묵을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말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들은 우리의 주장에 콧방귀도 안 뀌고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배가 고프고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그들이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매우 강력하게 얘기를 했다. 그 강력한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곧 우리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곰팡이가 핀 관아 객사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즉시 짐 꾸러미를 풀어 통조림 수프를 데우고 차를 데워서 먹을 준비를 마쳤다.

음식 몇 숟가락을 입에 넣고 있을 바로 그때, 우리는 문밖에서 현감이 도착하였다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먹으려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약 20여 명의 관원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했다.

1905년 말콤 앤더슨이 촬영한 제주목 제주성 서문 광경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4명의 남자가 그의 앞에 섰는데, 한 명은 4피트 길이의 장죽 담뱃대를 들고, 한 명은 그의 우산, 한 명은 그의 공식 문장(紋章), 또 한 명은 그의 담배 가방을 들었다. 물론 우리는 하던 저녁 식사를 중단하고 그를 대접해야 했는데, 그의 방문이 충분하게 세 시간이나 되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날(3월 11일)에도 그는 우리를 방문해 거의 서너 시간을 보냈고,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내일 다시 우리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신경이 곤두서서, 강한 북풍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3월 12일) 아침 떠나기로 했다.

강한 바람이 몰아쳐서 그 강풍을 뚫고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나는 출발하기 전에 겉옷을 끼어 입었고 켄뮤어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그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자신은 온실에서 자란 식물이 아니라고 하며 그냥 출발했다. 곧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고, 우리는 그의 뒤에 한참 떨어져 뒤처져 갔다. 길을 모르고 갔기에 그가 길을 잃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우리가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으며 길잡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는 우리가 점심을 먹고 숙박을 하려고 계획한 그 마을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을로 가는 길을 묻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제주 탐방기 원본 마지막 페이지 ©UTS, Burke Library Archive

그래서 나는 우리가 나아가는 동안 그를 찾기 위해 함께 간 일꾼을 보냈다. 우리가 쉬려고 멈춘 곳에 도착한 시각은 겨우 5시였다. 거기에서 제주(Chai-poo)까지의 거리는 20리(또는 7마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 나아가서 제주 섬 여행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만약 켄뮤어 씨가 오면 그를 제주(Chai-poo)로 바로 올 수 있도록 안내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안내 일꾼들과 계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제주(Chai-poo)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미 거기에 도착한 켄뮤어 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그는 제주(Chai-poo)로 곧바로 가기로 결심하고, 갈 길을 물어물어 하루종일 쉬지도 음식물을 먹지도 못하고 걸어서 제주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섬 일주 여행을 마쳤다고 생각하며 큰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23). 끝.

피터스의 제주 탐방기 역자 후기

앞에서 독자 여러분들이 읽은 제주 탐방기는 1899년 발행된 『the Korean Repository』(이하 『리포지터리』) No.10에 실린 내용이다. 여기에 소개한 피터스의 제주 탐방기 완편은 1899년 발행된 『리포지터리』 No.10~12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된 바 있다.

하지만 무슨 연유인지 1905년 『the Korea Review』(이하 『코리아 리뷰』) 편집자들은 이 글을 못 본 독자들이 많다고 판단하여 1899년 『리포지터리』에 실렸던 제주 탐방기를 재수록하기로 편집회의에서 결정했다고 이유를 밝히고, 『코리아 리뷰』 1905년 5월호와 6월호에 ‘제주 탐방기’ 후편 부분만을 게재했다.

제주시우당도서관에서 2013년 발간한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 표지 ©제주시우당도서관

제주시우당도서관에서는 2013년 『서양인들이 남긴 제주견문록』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 『코리아 리뷰』에 게재된 ‘제주 탐방기’를 고영자 박사가 번역해 소개했다. 피터스의 제주 탐방기 후반부 내용을 보고자 하는 독자들은 1899년 간행된 『리포지터리』, 1905년 간행된 『코리아 리뷰』, 또는 우당도서관에서 발간한 『제주견문록』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에서 1988년 2월 발행한 『탐라문화』 제7권에 게재된 〈Some Early Western Travellers to Cheju Island, 歐美人들의 濟州 踏驗記〉24)를 읽었다. 여기에 데이비드 네메스(David J. Nemeth)25)의 초록(抄錄)과 그가 쓴 피터스(A. A. Pieters)의 글에 대한 개관(槪觀)을 소개하고, 그의 평론에서 발견된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다.

먼저 네메스의 〈구미인들의 제주 답험기〉 초록 중 평설 부분을 뺀 자료는 다음과 같다.

본고는 이른 시기(1653년부터 1936년까지) 제주를 실제 답험하였던 9인의 답험기록들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하나 개관하였다. 그 순서는
1635년 하멜
1854년 벨취 선장
1888년 샤일-롱 주한 미 사절
1898년 피터스
1900년 샌즈 주한 미 외교관
1901년 겐터 박사
1913년 앤더슨
1930년 스토츠너 장교
1936년 스미스 여사 등이다.
개관 항목은 방문 연대, 방문 목적, 직업, 국적, 기록에 대한 평설, 자료 출처, 답험기의 질 등으로 논하였다. ...(이하 생략)
보다 더 자세한 내용들은 본문에 소개된 자료 출처 및 필자의 다음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데이비드 네메스가 피터스의 글 ‘제주 탐방기’에 대해 개관한 것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 후, 필자가 이글 앞부분에 있는 방문 연대, 목적, 직업, 국적 등에서 발견한 오류들은 원문 아래에 우리말로 설명하고자 한다.

A. A. Pieters
* date visited: February 1898. He call the island “Quelpart”.
→위의 오류를 바로 잡자면, 제주도 방문 기간은 1899년 2월 23일부터 3월 하순까지이며 서울 귀경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 purpose of visit: A tour; perhaps a reconnaissance for future missionary work.
→방문 목적을 관광이라 했고, 아마도 향후 선교 사역을 위한 정탐일 것으로 추측했는데, 그가 추측한 대로 피터스는 당시 대영성서공회 부총무로 총무 켄뮤어 목사와 함께 성경반포와 선교 가능성을 알아보고자 ‘탐방’을 위한 여행을 한 것이다.
* occupation: Apparently, a minister
→직업에 관하여는 대충 보아 목사라 했는데, 위에서 설명했지만 당시 피터스의 담당 업무는 ‘매서활동’, 즉 복음서를 판매하며 전도를 하는 선교사였다. 이들은 제주도를 떠나며 가져갔던 복음서 60~70권을 제주도에 남겨놓았다.
* home: An American? Perhaps Canadian or British. His visit organized in Seoul.
→국적은 미국인? 아마도 캐나다인 또는 영국인이라고 했지만 모두 오류이다. 피터스는 1871년 러시아(현, 우크라이나 지역)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 event analysis: None. He does not describe his visit in a chronological order.
→행사 분석이 없었고 피터스의 ‘제주 탐방기’를 일자별로 쓰지 않았다고 했으나 이는 아쉽게도 네메스가 ‘제주 탐방기’ 후반부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술했을 것이다. 피터스와 켄뮤어가 제주를 향해 서울에서 출발한 날짜는 2월 18일이었고, 다시 서울로 귀환해 도착한 날짜는 3월 25일이었다.

계속해서 데이비드 네메스는 그의 소논문에서 ‘제주 탐방기’ 후반부를 읽고 다음과 같이 글을 요약하고 평설(comments) 했다.

평설(評說)
* 피터스는 제주목에 1,200여 가구가 살고 있다고 했다.
* 그는 일본인들이 굴을 채취하러 섬에 무단 침입하는 행위를 알렸다.
* 피터스는 “길거리에서 세 여자를 만날 때 남자는 한 명밖에 볼 수 없다”고 기술했다.
* 그가 본 서민들은 개 가죽으로 만든 옷과 땡감을 압착해 염색한 옷을 입고 있었다.
* 그는 제주목 성내에서 작은 상점 8개밖에 보지 못했다.
* 제주에는 5일장이 없다고 한다.
* 그는 제주에서 나는 교역 상품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전복, 해초, 전통 한약재, 화장품용 동백기름, 말과 소가죽, 제주 조랑말과 제주산 소.
* 제주 말의 평균 가격은 16달러이고, 제주 한우 한 마리는 25달러이다.
* “돌하르방들”에 대해 피터스는 현무암을 깎아서 각 성문 바깥에 세워놓은 6~8개의 커다란 신상이라고 이해했다.
* 그는 폭포를 관광했고, 오백장군 바위를 보았다.
* 그는 삼성혈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 그가 알기로는 제주 섬에 12명의 유배자가 있다고 했다. 마지막 유배자는 1895년경에 제주도로 보내졌다고 피터스는 기술했다.
* 기상 악화로 육지로의 출발이 6일이나 지연되었다. 그들은 이후 삼판(무동력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제주 탐방기’ 자료
A. A. Pieters. “A Visit to Quelpart.” Korea Review: a monthly magazine. 5 (May-June, 1905) 172-179, 215-219.

‘제주 탐방기’에 대한 평점
Good. Pieters takes a trip entirely around the island. His descriptions of landscape and customs are detailed. Unfortunately, his report is too brief.
* 훌륭하다. 피터스는 제주도를 거의 다 돌아보았다. 그가 기술한 풍경과 제주 도민의 풍속들이 잘 묘사되어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탐방기가 짧은 것이 흠이다.

위와 같이 비평한 데이비드 네메스의 평가에 대한 필자의 소견은 아마도 네메스가 앞에 역자가 소개한 ‘제주 탐방기’ 전반부를 볼 수 있었다면 ‘제주 탐방기’의 평점을 이보다 더 높은 ‘Excellent’로 평가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부연하자면, 『코리아 리뷰』의 편집진이 평하듯이 여러 사람에게 소개하고 싶은 특별한 섬 여행기라고 평가했으리라는 생각이다.

1895년 대한국에 입국한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총무로서 1896년 5월 한국지부를 공인받고, 1905년 4월까지 한글성서의 새로운 번역과 반포의 주역이었다. ©Korea Bible Society

대영성서공회 총무 켄뮤어는 피터스와 함께 제주도를 다녀온 직후 짤막한 제주탐방 보고 기사를 『The Bible Society Reporter』에 보냈는데, 이는 1899년 7월호에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피터스와 나는 대한국 남쪽에 있는 작은 섬 제주도(Quelpaert)를 향해 이곳을 2월 18일 출발해 4주간 섬에 머물고 3월 25일 돌아왔습니다. 이번 여행은 힘들었고, 이전에 어느 외국 선교사도 가본 적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대영성서공회는 한 지역을 더 개척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제주 섬에는 항구 시설, 도로, 상점, 여관 등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돌아오며 그 섬에 많지는 않지만 60~70권의 복음서를 두고 왔기에, 이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치유되고 빛을 가져다줄 수 있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1899년 3월 30일)”26)

이렇게 켄뮤어 총무와 4주간의 긴 여행을 마친 피터스는 곧바로 그와 함께 대영성서공회에서 부총무로 근무하고 있던 사익스, 그리고 영국 선교부 배드콕 선교사와 함께 동해 북부지방 여행길에 올랐다.

『리포지터리』 Vol.1, No.10, April 13, 1899. p.6.에 이들의 동해 북부지방과 만주지역 탐방 여행 단신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대영성서공회 피터스, 사익스(A. A. Sykes), 그리고 영국 선교부의 배드콕(Rev. J. S. Badcock) 선교사분들이 금강산을 거쳐 원산으로 향하는 북부 여행길을 1899년 4월 12일 출발했다. 피터스 씨는 계속해서 만주지방의 한국 이주민들을 만나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돌아올 것이다.”

이제 ‘제주 탐방기’를 쓴 피터스 선교사의 삶과 그의 가족에 대해 정리하고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피터스는 대한국에 미국성서공회의 매서인으로, 또한 대영성서공회 부총무로 근무하며 선교 초기 성경반포 사업의 개척자였다. 그는 1899년 9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로 건너가 매코믹대학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북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신학을 하는 동안 미국에 귀화하게 되었고, 1902년 같은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엘리자베스 캠벨(Pieters, Elizabeth Campbell)을 만나 결혼을 한 후, 이제는 매서인, 성서공회의 직원이 아닌 ‘New Albany Presbytery’에서 안수를 받은 목사요, 장로 교단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로서 1904년 필리핀으로 함께 가게 된 것이다.

부부가 함께 시작한 선교사역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필리핀을 향해 배에 오른 직후부터 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발견되었다. 이들은 필리핀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열대 지방의 날씨보다는 나은, 엘리자베스의 고향 시카고의 기후와 비슷한 대한국으로 선교지를 변경해 파송 받아 1904년 9월 13일 대한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피터스와 함께 열정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던 부인은 폐결핵이 점점 악화하여 1906년 1월 5일 소천, 양화진에 잠들었다.

히브리어 원전을 잘 읽을 수 있던 피터스는 번역위원회의 관심을 받았고, 드디어 1906년 10월 3일 크램(Willard Gliden Cram)27) 선교사와 함께 공인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선임되어 1910년 공인번역위원회가 구약 한글 번역을 마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 후 1908년 피터스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에비슨(Dr. O. R. Avison)과 함께 의료선교를 하던 에바(Dr. Eva H. Field)와 재혼을 하여 슬하에 리처드(Richard)와 루벤(Reuben), 두 아들을 두었다. 황해도 재령, 평북 선천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와 성서개역에 매진하는 동안 피터스는 1930년 첫 번째 부인을 기리며 ‘엘리자베스 추모사업’의 목적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결핵환자 진료소’를 마련해 주었고 크리스마스실 사업에도 동참했다. 그러나 1932년에는 재혼한 부인 에바도 잃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피터스는 의료선교사였던 아내를 추모하고자 세브란스 치과 병원에 ‘수술실’을 마련해 주었다.

1933년 안식년 휴가로 미국에 간 피터스는 앤(Anne Cooper)과 결혼, 1934년 앤과 함께 다시 대한국으로 들어와 1941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국인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도록 성경반포와 성경번역의 핵심적인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피터스는 한국교회에 수많은 교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닦았던 고마운 선교사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

[미주]
21) 1880년 간행된 ‘한불자전’에는 “졍의, TJYENG-EUI, 旌義, Quelpaërt(Tjyei-tjyou). 1 hyen-kam”라고 기술되어 있다. “애초 정의현이 설치될 때 그 관아가 들어선 읍치이자 읍성으로 둘러싸여졌던 곳은 현재의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일대였다. 그러나 세종 4년(1422) 12월 현장을 돌아본 都按撫使(도안무사) 鄭幹(정간)의 건의에 따라 정의현의 읍치를 晉舍里(진사리), 즉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출처: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22) 1880년 간행된 ‘한불자전’에는 졔쥬, TJYEI-TJYOU, 濟州, 1 hpan-koan, 4 cantons. 라고 제주를 기술했다. 피터스의 글 원본에는 “Chai-joo or Choo-Song이라 표기 했으나, 여기 리포지토리에 기록된 ”Chai-poo“는 편집자 또는 인쇄소 식자공이 Chai-joo를 잘 못 본 것으로 보인다.
23) 피터스의 탐방기 마지막 문장 원문은 “Our faces were red nd and sncorting from the strong wind as if they were scalded, but it was a great relief to think that our trip around the island was at last finished”라고 되어 있다. 당시 리포지터리 공동편집자 존스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피터스가 쓴 이 ‘제주 탐방기’를 교정해서 게재한 흔적을 원문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시 피터스는 영어를 습득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은 시기였다.
24) 데이비드 네메스(David J Nemeth). "Some Early Western Travellers to Cheju Island." 탐라문화 0.7 (1988): 153-180.
25) 논문을 게재할 당시 1988년 데이비드 네메스는 미국 Central Michigan University 지리학과 교수였다.
26) Kenmure, 「Pioneering in Korea」, The Bible Society Reporter, July, 1899, p.168.
27) 크램(Willard Gliden Cram, 奇義男)은 피터스와 함께 1906년 성서번역위원회 번역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번역위원으로서 잠언, 삼상·하, 말라기, 전도서 등의 번역을 도왔고, 개인적으로 레위기를 번역하였다. 대한성서공회사Ⅱ. 75p.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감수: 장서원 박사(서울대 천문우주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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