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바라 보는 새로운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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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과 ‘인촌 김성수’의 3.1운동
김형석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며칠 전 원로 언론인 남시욱 선생의 역저 <한국 보수세력 연구>를 선물로 받았다. 남시욱 선생은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다가 문화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면서,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한 정치학자이다. 필자는 이 책을 받자마자 정독하였는데, 개화사상부터 문재인 정부의 정치상황까지 대한민국 정치사를 체계적으로 망라한 역작이었다. 여기에 선생의 또 다른 저서인 <한국 진보세력 연구>를 합하면 명실공히 '대한민국 정치사'가 완성된다.

책을 읽는 가운데 내가 주목한 부분은 「3.1운동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공화제」라는 단원이었다. 저자는 이 글에서 3.1운동이 국내에서 최초로 모의된 시점을 언급하면서, 1918년 10월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여운홍을 통해 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에게 밀서를 보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른바 '3.1운동의 미주지역 태동설'이다. 이제까지 3.1운동은 국내·외 8군데서 태동하던 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모아졌으며, 그 진원지는 중국 상하이에 근거를 둔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으로 알려져왔다.

남시욱의 역저 <한국 보수세력 연구>와 <한국 진보세력 연구>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런데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3.1운동의 진원지가 하와이의 이승만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배진영,「이승만과 3.1운동」, <월간 조선> 2019.3 ; 인보길,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1952-54>) 소위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설'이다. 올해도 3.1절을 맞아서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이 주최한 '문재인 탄핵 3.1절 범국민대회'에서 전광훈 목사가 "3.1 운동은 이승만이 일으킨 것이다."고 다시금 주장하면서 '3.1운동 이승만 기획설'을 재론하였다. 이에 일부 언론 매체는 "전광훈 '3.1 운동은 이승만이 일으킨 것', 사실일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역사 왜곡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논쟁은 역사학적인 고증을 거치지 않고,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주고 받는 공방이어서 진실 규명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남시욱의 <한국 보수세력 연구>는 "이승만이 여운홍을 통해중앙학교의 김성수에게 거사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낸 구체적인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이승만과 김성수를 연결한 메신저(여운홍)와 메시지의 내용이 고스란히 담긴 《독립을 향한 집념: 고하 송진우 전기》(이하 <송진우 전기>)의 내용을 발굴한 것이다.

평생의 벗인 고하 송진우(1890-1945)와 인촌 김성수(1891-1955) ©김형석 교수 제공

그 내용은 1918년 10월 여운홍과 샤록스(Alfred M. Sharrocks) 선교사가 이승만을 만나러 하와이를 방문했는데, 이때 이승만은 이들을 통해 국내의 송진우·함태영·양전백 등에게 대중적 봉기를 거사해 줄 것을 당부했다. 여운홍은 귀국하자 인촌 김성수의 계동 집으로 찾아가 김성수와 송진우를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이승만의 밀서를 전달했다. 이런 사실을 수록한 <송진우 전기>에는 이승만의 밀서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구상한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만방에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하기 바란다. 중국에 망명 중인 망명객들은 파리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한민족 대표로서 김규식을 파견키로 결정하였으니, 국내에서도 이 구국운동에 호응하여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협조해달라."(<송진우 전기>, p.108)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연설하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이 편지에서 중요한 단서가 포착된다. 바로 "중국에 망명 중인 망명객들은 파리에서 열릴 강화회의에 한민족 대표로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구절이다. 이 내용에 따르면 이승만의 편지가 작성된 시기는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 어간이 된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은 향후 세계 질서에 대한 입장을 중국에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줄 것을 권고하기 위해, 크레인(Charles R. Crane)을 특사로 중국에 파견하였다.

크레인이 상하이에 도착한 후 환영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여운형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 후 식민지의 처리 원칙에 '민족 자결의 원칙'이 논의될 수 있다"는 크레인의 연설을 듣고, “한국도 대표 파견이 가능한가?" 여부를 물었다. 이때 크레인으로부터 "(개인적으로) 한국 대표의 참석을 지원하겠다"는 응답을 듣게 되었다.

이에 신한청년당에서는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신한청년당에 입당과 동시에 이사장으로 추대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이 날이 11월 28일이었고,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배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따라서 이 편지의 내용과 사실 관계를 대조해보면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 사이에 작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송진우 전기>에 등장하는 1918년 10월 여운홍이 샤록스 선교사와 하와이의 이승만을 예방하여 이승만으로부터 3.1운동에 관한 밀명을 받았다는 기록은 시기상으로 편지의 내용과 맞지 않는 오류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한국 대표단 - 여운홍(앞줄 좌①)과 김규식(앞줄 좌④)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런데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이하 <인촌 전기>)에는 그 내용을 이렇게 수록하였다. "1918년 12월 어느 날 미국 워싱턴에서 재미 동포들과 구국운동을 하고 있는 이승만이 (인촌에게) 밀사를 보내 왔다. 밀사는 이런 내용의 밀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미국 동지들도 구국운동을 추진하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 12월이면 세계 1차대전이 막 끝난 시기, 다급해진 이승만의 재촉이었다."

3.1운동의 '이승만 기획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근거로 인용하는 자료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이승만의 밀사가 김성수를 찾아 온 시점이 1918년 12월이라고 밝힌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여운홍이 미국에서 귀국하기도 전이어서 이 내용 또한 오류가 발견된다. 여운홍은 1918년 11월 스페인 독감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후, 11월 하순에 프린스턴대학교 신학원을 중퇴하고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서 1919년 2월 16일 귀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8년 12월은 여운홍이 하와이에 들러 이승만을 만난 시점이지, 귀국하여 인촌 김성수를 만난 시점이 될 수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 임시수도 관저에서 김성수 신임 부통령을 접견하고 있다.(1951.5.29) ©김형석 교수 제공

이렇듯이 인촌 김성수와 고하 송진우, 두 절친의 전기에 등장하는 3.1운동과 이승만 관련 자료는 유사한 내용이면서 출처가 불분명한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전기를 동아일보가 5년의 간격을 두고 간행한 것임을 감안하면, 동일한 자료(증언이나 문건)에 의해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인촌과 고하 송진우의 전기는 제대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구술에 의존하던 위인전의 한계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어서 사료로 인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렇다면 '3.1운동과 이승만의 기획설'을 검증할 이승만 측의 관련 자료는 없을까? 이렇게 이승만 자료를 찾던 중에 필자는 주목할만한 신문 기사를 발견했다. 1995년 중앙일보가 '이화장 자료'를 발굴하면서 특집 보도한〈이승만과 대한민국 탄생> 중의 16회 "이승만과 3.1운동"이다.

"1918년 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승만은 호놀룰루에서 '한인 기독학원'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는 세계대전을 마감하는 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 문제가 거론될 것을 예상했다. 특히 그는 승전국 미국의 대통령이며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은사(恩師) 윌슨이 강화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리라 판단하고 이 국제회의에 몸소 참석, 윌슨을 설득해 한국 독립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마음 먹었다. 그는 자기 계획을 1918년 10월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과 미국 선교사 샤록스를 통해 국내 민족 지도자들(송진우.함태영.양전백 등)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적시에 자기의 외교에 호응하는 대중운동을 펼쳐줄 것을 기대했다." - 중앙일보(1995.6.8.)

워싱턴 군축회의장에서의 이승만(좌)과 서재필(우) ©김형석 교수 제공

이 기사는 내용상으로 앞서 소개한 두 전기와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중앙일보가 이화장에서 발굴했다는 이 자료가 '1차 사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만 중앙일보의 기사는 이 자료에 대한 설명이나 출처를 언급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승만 관련 자료를 검색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대신 유영익(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사가 쓴 《이승만의 삶과 꿈》(중앙일보사, 1996)에는 이승만이 1918년 10월경 하와이를 방문한 미국인 의료선교사 알프레드 샤록스 박사에게 함태영·양전백·송진우 등에게 알려 국내에서 결정적인 대일(對日)혁명을 일으킬 것을 주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유영익의 저서에도 출처는 제시되지 않았다. 문제는 출처 불명의 이 자료가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내용상의 오류는 앞의 자료와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할 때는 정확한 사료에 기초하여 구성해야 하는데, 이처럼 부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이승만의 밀서가 3.1운동을 일으켰다"거나 "3.1운동의 불꽃을 당긴 사람이 이승만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지이며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설'이 갖는 한계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승만의 3.1운동 기획설'의 오류를 들어 이승만과 3.1운동의 관련성을 전면 부정하는 주장이다.

1918년 12월 1일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정한경·민찬호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한인 대표로 선출했다. 이에 1919년 1월 6일 호놀룰루를 출발한 이승만은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대한인국민회 회장 안창호를 만난 후 뉴욕을 거쳐 2월 3일 필라델피아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장택상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한 결과 파리강화회의 외교를 뒷받침할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를 소집키로 결정하였다.

서재필과 이승만 등이 개최한 제1차 필라델피아한인대회의 시가 행진 ©김형석 교수 제공

한편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여권을 받으려고 노력했지만, 일본 영사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여권 발급이 불가능해지자 프린스턴대학교 동창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윌슨 대통령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1919년 1월 26일자《뉴욕타임스 선데이 매거진》의 보도이다.

"파리에 있는 윌슨 대통령은 한 한국대표단으로부터 한국의 독립 요구를 고려해 줄 것을 청원하는 전보를 받았다. 대표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의 이름은 전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그 사람은 윌슨이 ‘올드 나소(Old Nassau·프린스턴대학의 별칭)’의 총장으로 재직할 때 그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 박사였다. 이 박사는 지금 호놀룰루에서 발간되는 《국민보》의 주필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승만의 시도에 대해 백안관은 “공무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면담을 거절하였고, 프랭클린 레인 미국 내무장관은 ‘미국 정부의 기본 방침은 한국 대표가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었다.

이에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승만은 정한경과 함께 3월 3일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위임 통치’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1919년 2월 25일자로 작성된 독립청원서의 내용이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일천오백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고, 또 이 회의에 모인 연합국 열강이 장래에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현재와 같은 일본의 통치로부터 조선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에 두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저희들의 자유 염원을 평화회의 석상에서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한반도는 모든 나라에 이익을 제공할 중립적 통상지역으로 변할 것입니다.”

이승만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독립청원서 ©김형석 교수 제공

국제연맹의 위임 통치를 요청한 이 독립청원서의 내용은 후일 이승만의 잘못된 독립정신을 비판하는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그러나 독립청원서는 '여러 만국 법률사들의 의향을 참작하여' 정한경이 작성한 것을 이승만이 국제법에 참조하여 수정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총회 행정위원회를 소집하여 그곳에서 승인을 받은 후 정한경에게 '동의 공함'을 보냈다. 이 같은 점에 비추어 '독립 청원'과 '위임 통치'는 이승만 개인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재미 한인들의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승만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하여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여러가지의 방략을 구상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여운홍을 통해서 국내에서의 궐기를 당부하는 밀서를 보낸 것은 3.1운동이 막바지 준비단계이던 2월 하순에야 전달된 것으로 보여지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려던 시도는 미국의 비협조로 참석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련의 시도는 2.8독립선언의 발발에 영향을 끼쳤다. 당시 도쿄의 유학생들은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하는 《태평양잡지》를 밀반입해 돌려가며 읽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김도연(초대 재무부 장관)의 회고에 의하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여운홍은 도쿄에 들러서 2·8독립선언을 준비 중이던 이종근에게 이승만 등 미주 독립운동가들의 동향을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김도연의 증언이다.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발간하던 <태평양잡지> ©김형석 교수 제공

"12월 1일 왜국 고베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지는 수행으로 우리에게 중대한 보도를 하였으니, 그것은 곧 '미주에 교거(僑居)하는 한인 중에 이승만·안창호·정한경 3씨가 한국 민족대표로 한국 독립을 제소코자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학생계는 아연 긴장되어 암암리에 서로 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동지가 모이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으며, 각교 각급의 동창들은 막연하나마 아무것이나 하여야 된다고 하며 그저 있을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 김도연, <나의 인생 백서: 상산 회고록>

2.8독립선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승만 일행의 파리강화회의 참가 소식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증언은 정영택과 최승만 등 핵심 인물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최팔용은 1918년 12월 고베에서 발간된 The Japan Advertizer에 실린 ‘Korea, Agitate for Independence’와 일본 매체에 간간이 소개되는 독립운동 소식을 보며 한껏 고무되었다. 재미동포들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고, 이승만 등 대표단이 파리로 향한다거나 미주 동포들이 거액의 독립 자금을 모금했다는 등의 뉴스를 접하고 있었다.(최승만, <나의 회고록>)"

일본 고베에서 발간되던 영자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의 기사 ©김형석 교수 제공

이 같은 증언에 비추어 이승만이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직접적인 관련성을 살펴보면 몇 가지의 추리가 가능하다. 첫째, 여운홍과 샤록스가 하와이의 이승만을 방문한 것은 1918년 12월일 것이다. 둘째, 2019년 1월 여운홍은 귀국 길에 도쿄에서 유학생 이종근에게 이승만의 동향을 전한 것이 2.8독립선언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셋째, 2월 16일 귀국한 여운홍이 김성수의 집을 찾아가서 이승만이 보낸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면 이런 사실이 어떻게 와전 되었을까? 1980년대 초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한 '인촌 김성수 전기 간행위원회'가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중에 3.1운동 발발과정에서 인촌이 이승만으로부터 밀서를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 채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3.1운동이 발발한지 65년이 지난데다 여운홍이 사망한지도 12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감수해 줄 사람도 없었다. 이 때문에 시기상으로 오류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5년 후 <송진우 전기>가 간행될 때, 그 밀서의 전달자가 중앙학교 출신의 여운홍이라는 사실이 보완되었다.

'인촌 김성수 전기'와 '고하 송진우 전집'① <독립을 향한 집념>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밀서, 밀사, 밀명 등의 용어가 사용되면서 마치 이승만이 3.1운동을 기획하고, 국내 인사들에게 지시한 것처럼 오해가 생긴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3·1운동 후 국내외에 수립된 임시정부들 -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국민의회(3.21), '조선민국 임시정부'(4.9, 서울), '대한민국 임시정부'(4.11, 상하이), '신한민국 임시정부'(4.17, 평안도), '한성 정부'(4.23, 서울) 등에 행정 수반으로 추대되었고, 1919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후일 증언자들은 이승만의 밀사나 밀서, 밀명 등으로 구술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하와이에서 활동하는 44세의 망명객에 불과하던 이승만이 3.1운동 이후 민족 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민족자결주의 주창자인 윌슨 대통령과의 교분설 때문이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우리나라와는 무관하였지만, 당시 분위기는 미국에 독립을 청원하기만 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앞다투어 이승만을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결과 이승만은 3.1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3.1운동의 발발은 물론 거사 후의 독립운동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이승만으로부터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을 처음 전달받았다는 인촌 김성수의 역할은 어떠했을까? 인촌과 3.1운동의 관련성을 중앙학교의 역할을 통해 유추해보면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3.1운동의 시발점이었던 도쿄 2.8독립선언과의 관련성이다. 1919년 1월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학교를 찾아와서 현상윤·송진우 등에게 2.8독립운동의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전달하였다. 이때 인촌은 송계백이 요청대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활자 보따리와 활동비를 제공하였다고 한다.(<인촌 김성수>, pp.125-6)

2.8독립선언의 주역들(좌)과 선언식장이던 도쿄 조선YMCA 건물(우) ©김형석 교수 제공

둘째, 송계백의 방문을 계기로 이들은 최린, 최남선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 등지에서 수차례 회동하면서 3.1운동의 거사를 모의하였다. 그러던 중 최남선의 제안으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평북 선천에 머무르던 남강 이승훈을 계동 인촌 김성수의 사저로 불러 양대 종교의 연합을 주선하였다. 이날이 2월 10일인데, 이때 인촌이 이승훈에게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활동비를 전했다는 설이 있다.(전 고대 총장 홍일식이 전하는 최남선의 증언)

셋째, 앞에서 언급한 이승만의 밀서사건이다. 인촌과 고하의 전기에 등장하는 이 사건은 여운홍 일행이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면담한 날자와 귀국 후 인촌을 찾아 온 날자가 부정확하여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그러나 필자의 추정대로 여운홍의 증언에 언급된 날자를 1918년 12월 하와이에서 이승만을 만난 여운홍이 1919년 2월 중순에 구국한 후 인촌을 예방한 것으로 정정하면 신뢰도가 훨씬 높아진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중앙학교가 3.1운동이 발발하는데 구심점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이승만의 밀서를 가져온 여운홍은 중앙학교 출신이었고, 2.8독립선언의 주역 송계백도 중앙학교 출신인 백관수의 소개로 현상윤을 찾아왔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에서 국제정세를 접하게 된 이들은 기독교와 천도교를 연결하는데 성공함으로써 3.1운동을 단일화, 전국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물론 중앙학교가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던 배후에는 교주인 인촌 김성수의 내락과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인촌은 거사 이틀 전인 2월 27일 고향 줄포로 내려가서 3.1운동의 시위현장에 없었고, 이로 인해 처벌을 피하게 된 것은 비겁한 행위였다는 지적이 따른다. 3.1 운동이 일어나던 날 인촌이 서울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당시 인촌과 함께 거사를 진행하던 송진우의 증언에 따르면, 3.1운동을 장기화하기 위해 제2의 시위운동을 주도할 세력으로 가장 연소자이며 실무자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중앙학교 측의 인사들이 민족대표 선정에서 빠졌으며, 내부적으로도 중앙학교를 살리기 위해 모의 단계부터 인촌은 남아서 학교를 지키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중앙학교 교정에 세워진 인촌 동상 ©김형석 교수 제공

송진우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없지만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수긍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1912년 도산 안창호가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자 곧 바로 평양의 대성학교가 폐교당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의 증언처럼 3.1운동으로 교장 송진우와 교사 현상윤 등이 옥고를 치루는 가운데서도 중앙학교를 지켜낼 수 있었다. 인촌의 진면목은 3.1운동이 끝나고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좌절감이 사회 전반에 드리웠던 1920년대 민족운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촌은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고, '태극성표 광목'을 생산하여 물산장려운동의 기초를 마련했다. 1920년 4월에는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단군릉 수축,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및 사당 건립,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등의 전통문화사업을 추진하여 언론을 통한 독립 역량 강화에 기여하였다. 1921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유진태 등과 함께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를 발족하였고, 1923년 조선민립대학설립기성회가 발기 총회를 갖고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펼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비록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1924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를 인수하여 민족교육을 시행함으로써 마침내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밖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하는 동안 인촌 김성수가 거액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처럼 인촌은 3.1운동 현장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3.1운동의 발발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을 뿐아니라 3.1운동 이후 1920년대의 민족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기념 사진(1923.3.3.1) ©김형석 교수 제공

모름지기 역사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서술되어야 한다. 3.1운동은 우남 이승만이나 인촌 김성수 등의 특정인에 의해 만들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3.1운동과 관련하여 이들의 역할이 분명하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연구 성과의 부족으로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우남 이승만과 인촌 김성수 두 사람이 남긴 독립운동에의 발자취를 재조명해 보는 것도 3.1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는데 새로운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김형석(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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