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퍼, 낙태허용 배후에 유물론적 인본주의 있다고 봐”

이상원 교수, 6일 ‘프란시스 쉐퍼’ 첫 번째 특강
이상원 교수 ©기독일보 DB

이상원 교수(총신대)의 프란시스 쉐퍼 특강이 6일부터 오는 7월 3일까지 매달 첫 번째 토요일 서울역 공항철도 회의실에서 진행된다. 이 교수는 6일 첫 번째 순서에서 ‘프란시스 쉐퍼 약전: 사상과 실천이 함께 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그는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는 말을 통한 진리의 변증과 증거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삶 속에서 진리 실천을 강조한 복음 전도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다”며 “그의 사역 초기 및 중기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이론적 변증에 주력했지만, 후기로 들어서면서 낙태, 영아살해, 안락사, 환경오염, 왜곡된 전체주의적 정치체제와 법체계에 대한 적극적 비판에 나섰다. 쉐퍼는 진리는 말을 통해 증거해야 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돼야 한다는 것을 삶으로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1912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난 프란시스 쉐퍼는 1935년 웨스트민스터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역사적 정통주의 신학의 입장을 체득했다”며 “역사적 정통주의는 초자연적 기적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믿는 신학 사조다. 출애굽 사건·여호수아의 명령으로 해가 중천에 머무른 사건·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예수님의 부활 등 성경 속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믿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쉐퍼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돼 오류가 없는 말씀이고, 진리는 경험적 체험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전달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며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론 즉 기독교 진리란 교회와 삶의 전 영역에서 동시에 구현돼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1947년 유럽 교회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여행에서, 쉐퍼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 과정, 라인홀드 니버 강연 등을 접하며 복음주의와 세계교회협의회는 함께 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며 “여행을 마친 쉐퍼는 파리에서 미국으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모터가 꺼지면서 추락의 위험을 겪었다. 이 때 미국 전역으로 생중계된 뉴스를 접한 가족들이 절실히 기도하자, 비행기 모터는 다시 원상태로 작동했고 쉐퍼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쉐퍼는 이후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성경은 역사적·과학적으로도 오류가 없다는 원리를 철저히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쉐퍼는 창세기 1~10장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의 모든 교리가 무너진다고 봤다”며 “반면 당대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는 역설 혹은 해학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며 ‘어떤 일이 진리인 동시에 비진리일 수 있다’며 고등비평을 일부 수용해 창세기1~3장을 신화로 간주했다. 바르트는 에덴동산이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장소가 아니라도 인간이 어떻게 죄인이 됐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쉐퍼는 ‘역사적으로 그릇된 것이라도 종교적으로 진리일 수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에 대해 ‘양자를 서로 무관한 것으로 구분짓는 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또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실재’인지 고민했던 쉐퍼는 어느 날 산장의 건조창고에서 성령 충만을 경험한 뒤, 하나님의 실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며 “이후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실재 곧 성령의 현존하는 능력 안에서 자기를 죽이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는 삶이라고 주장했다”고 했다.

이상원 교수가 프란시스 쉐퍼 강의를 전하고 있다. ©주최 측 제공

아울러 “쉐퍼가 1954년 스위스 선교 준비 도중 극적으로 재정 공급을 받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55년 현지 사역지에서 추방 위기를 겪는 등 고난을 겪었다”며 “이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로, 6주 만에 추방 위기 문제를 해결받았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쉐퍼는 라브리 공동체의 4가지 운영원칙을 세웠다“고 했다.

그는 “첫째, 재정적, 물질적 필요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후원금을 요청하지 않고 기도로 하나님께만 알린다. 둘째, 하나님께서 스스로 택한 사람들만 오게 하고 나머지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도록 기도한다. 셋째, 인위적으로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을 계획하시고 그 계획을 펼쳐 보여 주시도록 기도한다. 넷째, 일상적인 통로로 간사를 간청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택하신 간사를 보내 주시도록 기도한다는 것”이라며 “이 원칙에 따라 라브리 재정은 철저히 자발적인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충당됐다. 라브리 사역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쉐퍼의 실천적 믿음의 열매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라브리 사역은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훗날 저명한 복음주의 학자가 된 오스 귄네스(Os Guinness), 기독교 철학자가 된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 웨스트민스터 교수가 된 윌리엄 에드가(William Edgar) 등은 라브리 공동체를 통해 회심했었다”며 “라브리에 온 사람들은 철학과 신앙이 별개라고 생각했지만 라브리를 떠난 이후, 철학과 신앙이 통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삶의 모든 영역들과 관련되며, 다른 세계관의 장·단점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한다고 깨달았다”고 했다.

이어 “1960년대 초반까지 주로 기독교 진리의 이론적 변증에 집중됐던 쉐퍼는 이후 사회·윤리적 실천에 집중했다. 쉐퍼가 사회실천 운동에 뛰어들게 된 본격적 계기는 바로 1973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로우 대 웨이드 낙태허용 판결이었다”며 “이에 대해 쉐퍼는 낙태허용 판결의 배후엔 유물론적 인본주의 가치관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봤다. 이는 인간 생명을 끊임없이 위협할 수 있고, 낙태가 허용된다면 장애유아 살해, 안락사로 이어질 수 있고 주장했다. 이에 쉐퍼는 낙태 허용법을 견제하기 위한 사회 행동에 적극 투신했다”고 했다.

그는 “쉐퍼의 노력으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엔 낙태 반대운동이 시작됐다. 그 동안 미국문화로부터 소외됐던 미국 복음주의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주의로 나오게 된 계기로서, 이후 미국 정치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며 “쉐퍼는 인본주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정부와 법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을 간파했다. 즉 인간 생명의 파괴와 독재 정치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만일 정부 정책과 행동이 법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기독교인들은 힘의 행사를 포함한 시민불복종까지도 불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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