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누구도 살인이 합법이 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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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헌법재판소가 낙태를 처벌하는 형법 269조와 270조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헌법 10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후 낙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갈등이 점점 더 골이 깊어지고 있다. 헌재 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모자보건법 14조에서 규정하는 '인공임신중절(낙태)' 예외 조항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 형법에 따라 무조건 처벌하도록 돼 있었다.

헌재는 이 조항이 자신이 갖는 존엄성을 토대로 여성이 스스로 내리는 낙태 결정을 과잉 처벌한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낙태를 처벌하던 형법의 효력이 일시 정지되었고, 국회는 올해 말까지 새로운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

헌재의 판결이 낙태를 무조건 허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입장을 고려해 낙태의 처벌 범위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아예 이 참에 낙태죄 폐지를 밀어붙이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어 낙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찬반 논쟁이 다시 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4개 여성단체가 온라인으로 ‘낙태죄 폐지 시민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 응답자의 99.2%가 ‘낙태죄 처벌을 반대한다’고 했고, 99.8%는 ‘여성의 권리를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내용이다. 여성단체 4곳은 이 설문조사 결과를 의견서 형태로 법무부와 보건복지부 등 관련 기관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조사대로라면 국민 전체가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는 셈이다.

그러자 바른인권여성연합이 이를 전면 반박하는 성명서를 지난 10일 발표했다. 바른 여성인권연합은 먼저 이 여성단체들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심각한 통계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했다. 그 근거로 설문조사의 표본추출방법의 오류, 즉 표본의 대표성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문제의 설문조사는 ‘2020 낙태죄 폐지 시민설문조사’라는 제목으로 8월 14일부터 9월 1일까지 19일간 온라인상에서 시행되었다. 설문 제목에서부터 목적이 ‘낙태죄 폐지’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러니 자연히 낙태죄 폐지에 동의하거나 관심이 지대한 사람들을 위해 기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설문하는 주체의 온라인 주소를 여성단체의 주요 온라인커뮤니티에 공개함으로써 이미 이 여성단체의 정체성에 동의하거나 관련이 있는 사람들의 응답을 적극 유도했을 개연성이 크다.

리서치 전문가들도 이들 4개 여성단체가 사용한 설문조사의 오류를 ‘응답자의 자기선택 오류’(self-selection error)라고 규정한다. 이는 표본 추출이 응답자의 자발성에 의존함으로써 발생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따라서 표본추출방법 자체에 오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설문결과를 여론의 표본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무슨 여론조사든지 99% 이상이 찬성하는 결과가 나왔다면 그것은 이미 여론조사로서의 의미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일방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데 굳이 여론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더구나 국민 대다수가 그토록 원하는데 그동안 사회적으로 끊임없이 논란이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한국교회를 비롯, 천주교까지 낙태에 대해서 엄격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해 온 것에 비춰만 봐도 우리 국민 99%가 낙태를 찬성한다는 조사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다.

최근 성산생명윤리연구소가 이와 비슷한 주제의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여성단체 4곳이 내놓은 결과와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 이 연구소가 지난해 여론조사기관에 의뢰해 전국 만19세 이상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낙태 관련 전화 설문조사에서 ‘무조건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은 17.5%에 불과했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낙태를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도 판결에서 태아의 생명 보호를 ‘공익’으로 인정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 아예 낙태가 죄가 아니라는 식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인명 경시 풍조를 더욱 확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여성의 보건과 건강을 위한 자기 결정권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상으로 태아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지킬 힘이 없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법으로 보호하고 존중해야 마땅하다.

박상은 박사(샘병원 미션원장)는 본보에 기고한 글에서 “국회에 제출된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차별이 자행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태아 차별이다. 모든 태아는 차별받지 않고 태어날 권리가 있다”고 썼다. 박 원장은 이어 “그 어떤 차별금지법보다 태아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낙태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누구도 그런 살인을 저지를 권리는 없다. 다만 임신이 누군가에게는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도 존재한다는 것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태중에 생명을 제대로 낳아 키울 수 없는 여건과 사회 분위기는 끊임없이 낙태를 권유하고 유혹할 것이다.

인구 절벽 시대에 임신이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려면 아기를 낳아 사회의 일원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그 용기를 북돋워주고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국가와 사회, 그리고 필히 교회가 먼저 나서야 한다. 그것이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소모적 갈등보다 훨씬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

#사설 #낙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