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부끄러워할 줄 잊어버린 시대"(Forgetting how to blush)을 9월 2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악을 찬양하고 환호하는 소셜미디어 게시물과 뉴스가 끊임없이 쏟아지는 현실에 지친 사람이 필자뿐일까. 필자는 진심으로 지쳤다. 테네시대학교 법대 교수 글렌 레이놀즈(Glenn Reynolds) 역시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듯하다. 그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매우 우려스러운 흐름을 지적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어두운 충동을 감추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 점점 더 노골적으로 가면을 벗어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끔찍한 생각에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때로는 악행 자체를 즐기거나 찬양하기까지 한다.
무슨 뜻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나이티드헬스케어(UnitedHealthcare) CEO 브라이언 톰슨이 살해된 뒤에는 범인 루이지 만지오네를 공개적으로 찬양하고 우상화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온라인에서는 톰슨과 같은 사람의 죽음을 조롱하거나 정당화하는 반응도 이어졌다.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32세 부사장 에린 플라센티가 타임스퀘어에서 한 괴한의 흉기에 찔렸을 때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영화감독 렉시 알렉산더는 은행 측의 이스라엘 금융기관 투자 문제를 언급하며 플라센티가 일종의 ‘업보(karma)’를 치른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내놓았다.
찰리 커크(Charlie Kirk)의 죽음을 두고도 일부 온라인 공간과 대학가에서는 이를 조롱하거나 기념하는 표현들이 등장했다. “해피 커크 기념일(Happy Kirkiversary)”이나 “메리 커크마스(Merry Kirkmas)” 같은 표현까지 공개적으로 사용됐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이 정치적 폭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과거 태아 생명권 옹호론자(pro-life)들은 출생 전 인간 생명의 제거를 합법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결국 특정 조건에서는 출생 이후의 어린아이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며 조롱받기도 했다. 그러나 피터 싱어(Peter Singer)와 마이클 툴리(Michael Tooley) 같은 철학자들은 실제로 영아의 생명과 도덕적 지위에 관한 논쟁적인 주장을 발전시켜 왔다. 처음 이러한 논의가 등장했을 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뒤따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간 생명의 가치와 경계를 둘러싼 도덕적 기준 자체가 점점 논쟁과 타협의 대상이 되는 문화를 마주하고 있다. 린지 클랜시(Lindsay Clancy) 사건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정신적·정서적 상태와 책임의 관계를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에 대해 극명한 의견 차이가 나타났다. 분명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명백히 악한 일을 축하하다가 그것이 드러나면 적어도 부끄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치심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억제 장치로 기능했던 것이다.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말과 행동이 사람들 앞에 드러났을 때 얼굴을 붉히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공동체의 도덕적 경계를 넘어섰음을 인식하는 일종의 신체적·정서적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수치심마저 사라진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로 그런 사회를 묘사한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렘 8:12). 오늘날의 현실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는 묘사다. 성경은 한 사회가 어떻게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한다.
미국 역사에서 기독교가 차지해 온 역할을 어떻게 평가하든, 유대·기독교적 도덕관이 미국의 법과 제도,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화적 기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왔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떠받치던 여러 억제 장치가 약화되면서 그 구조 역시 흔들리고 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악이 문화를 어떻게 침식하는지를 다룬 설교에서 하나님이 인간 사회 안에 여러 형태의 억제 장치를 두셨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죄성과 부패가 무제한적으로 표출되지 않도록 일정한 장벽을 세워 사회와 문명이 유지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가 제 역할을 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누리며 비교적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들이 공격받고 약화될 때 사회는 점점 자기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설명이다.
그 첫 번째 기둥은 인간의 양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옳고 그름을 인식할 수 있는 도덕적 감각을 주셨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신이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을 반복해서 거부하면서 양심을 억누르고 왜곡할 수 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딤전 4:2)라고 표현한다. 양심이 계속 무뎌지면 이사야의 경고가 현실이 된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이 과정은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사람은 처음부터 악을 찬양하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악을 행하고, 이후에는 그것을 합리화하며, 그다음에는 이름을 바꾸어 정당화하고, 결국에는 악을 공개적으로 자랑하고 축하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두 번째 억제 장치는 가정이다. 가정은 아이가 권위와 책임, 희생과 사랑, 진리와 도덕적 경계를 처음 배우는 곳이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회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러나 가정이 약화되고 본래의 교육적·도덕적 역할을 상실하면 사회가 의지해 온 중요한 닻 하나도 함께 흔들린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이 단순한 억압이나 권위주의로만 이해되고, 모든 전통적 권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자유와 해방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문화에서는 권위와 책임, 도덕적 한계에 대한 저항이 커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없다.
세 번째 보호 장치는 정부, 곧 국가 권력이다. 바울은 정부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롬 13:4)라고 말한다. 성경적 관점에서 국가 권력에는 악을 억제하고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며 정의를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국가가 범죄를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고 악에 따른 책임과 형벌이 사실상 사라지게 되면 사회는 그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솔로몬은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라고 기록했다.
악이 반복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학습한다. 법을 어겨도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때로는 규칙을 어기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된다고 판단하며, 자신이 행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이유도 점차 잃어버릴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 억제 장치는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교회다. 사회 문제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인간의 마음이 있으며, 성경은 외적인 제도와 규율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나 교회 역시 문화적 붕괴의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너무 많은 교회가 교리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영성, 책망 없는 격려만을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위로해 주는 예수는 원하지만 삶을 변화시키고 순종을 요구하는 주님은 원하지 않는 태도가 자리 잡기도 한다.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보다 부드러운 젖을 원한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를 배워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책망하며,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라고 말한다(히 5:12~14). 영적인 성숙은 단지 많은 지식을 쌓는 데 있지 않고, 지각을 훈련해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는 데 있다.
살인이 오락거리처럼 소비되고, 잔인함이 미덕처럼 포장되며, 악한 행동을 자랑하는 문화가 형성된다면 사회의 도덕적 감각이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악을 악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라면 문제는 더욱 깊어진다.
우리에게는 악을 마주했을 때 적어도 그것이 잘못됐음을 느끼고 얼굴을 붉힐 수 있는 도덕적 감수성이 다시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궁극적인 해답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더 강한 수치심을 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굳어진 양심과 왜곡된 욕망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다시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해야 한다. 죄를 죄라고 부르되 정죄에서 끝나지 않고, 회개와 용서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함께 전해야 한다. 동시에 그 복음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신이 먼저 순종으로 살아내야 한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예절의 회복이 아니다. 선과 악을 다시 분별할 수 있는 양심의 회복이며, 기독교 신앙은 그 회복의 중심에 복음으로 새로워진 인간의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