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일 모로의 기고글인 '성찬은 은혜를 더하는 의식이 아니라, 받은 은혜를 기념하는 자리다'(The Lord's Supper doesn't give grace. It celebrates it)를 9월 2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일 모로(Dale Moreau)는 성서학 학사(BA), 목회학 석사(MDiv), 성서신학 및 성경언어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으며, 30년 동안 목회자로 섬겼다. 또한 대학과 신학교에서 강의했으며, 55년 넘게 글을 써왔다. 그의 저술은 학술 문헌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현재 그는 서브스택(Substack)에서 ‘Theological Voice’를 운영하며, 목회자와 학자, 학생들을 위해 성경이 담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관을 재조명하고 회복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우리 대부분은 일종의 개인적인 ‘점검 목록(checklist)’을 가지고 주의 만찬, 곧 성찬에 나아가도록 배워왔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죄를 자백하며, 떡과 잔을 받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들어왔다. 자신을 성찰하고 죄를 회개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 경건한 태도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바울이 직접 문제 삼고 있는 상황을 살펴보면, 그의 경고가 단지 개인의 내면 상태를 점검하라는 요구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해가 생긴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성찬은 교회 역사 속에서 매우 풍부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받았고, 여러 전통은 떡과 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지, 성찬을 통해 어떤 은혜가 주어지는지를 서로 다르게 설명해 왔다. 그 과정에서 신약성경 본문 자체가 강조하는 목적보다 후대의 신학적 논쟁이 앞에 놓이는 경우도 있었다.
우선 신약성경이 명확하게 밝히는 성찬의 핵심 목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말한다(고전 11:26). 성찬에는 분명히 기억과 선포라는 방향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뒤돌아보고 다시 오실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의 죽음을 공동체 가운데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 역사에서 논의돼 온 성찬의 모든 신학적 의미가 이 한 구절만으로 곧바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울이 직접 강조하는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선포하며 그 희생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함께 식탁에 참여한다는 의미가 놓여 있다.
이미 이루어진 속죄와 교제의 식탁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찬을 설명하면서 이스라엘의 제사와 공동 식사라는 배경을 활용한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그는 제물을 먹는 행위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제사가 가리키는 대상과의 ‘참여’ 혹은 ‘교제’를 나타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는 제사의 종류에 따라 제사장이나 제물을 드린 사람이 제물의 일부를 먹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화목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교제와 화평을 상징하는 공동 식사의 성격을 지녔다. 일부 속죄제 역시 제사장이 먹도록 규정됐지만, 속죄의 효력 자체가 먹는 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속죄는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을 통해 이루어졌고, 식사는 그 관계 안에서 누리는 참여와 교제를 표현했다.
이 배경은 주의 만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자가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가 그리스도의 희생을 다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이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으며,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셨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성찬은 그 완성된 희생을 다시 반복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희생으로 가능해진 화해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과 다른 성도들과 함께 누리는 교제의 식탁이다.
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보충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빚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됐다는 복음을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고 선포하는 식사다.
성찬은 가벼운 식사가 아니다
그러나 성찬을 ‘식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의미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성찬을 설명하며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단순한 친목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참여와 교제, 공동체적 연합을 나타낸다.
바울은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고 묻는다(고전 10:16). 이어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 말한다.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뿐 아니라 성도들 상호 간의 관계까지 드러내며, 한 떡에 참여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다.
바울이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나타내는 행위이며, 그런 의미에서 성찬에는 충성의 고백이라는 성격도 있다. 형식은 단순하지만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는 고린도전서 11장의 유명한 경고다.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오랫동안 개인의 죄를 철저히 점검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적용돼 왔다. 자기 성찰 자체는 분명히 성경적인 태도이며, 바울 역시 바로 이어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어떤 상황을 두고 이 경고를 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몇몇 신자가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사적인 죄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의 만찬을 나눌 때 공동체 자체가 심각하게 분열돼 있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먼저 자기 음식을 먹어 배부르고 심지어 취해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시 사회적·경제적 차이가 교회 공동체의 식탁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 된 공동체가 그 일치를 선포해야 할 바로 그 자리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풍족하게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수치를 당하고 있었으며, 바울이 격렬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이 모순이었다.
성찬의 내용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 식탁에서는 “너와 나는 다르다”는 행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합당하지 않게” 성찬을 먹고 마신다는 경고는 무엇보다 성찬이 선포하는 복음과 모순된 방식으로 공동체를 대하는 행위를 겨냥한다. 개인적인 회개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자기 성찰의 범위를 자신의 내면만이 아니라 형제자매를 대하는 방식까지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주의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울은 또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몸’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해석이 존재해 왔다. 어떤 전통은 성찬의 떡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고, 다른 해석은 바로 앞뒤 문맥과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반복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특히 후자의 해석에 따르면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성찬에 모인 공동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고려하면 이러한 해석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어떤 사람들은 배불리 먹는데 다른 사람은 굶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즐기는데 다른 사람은 수치를 당하고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몸이라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교회의 실패는 단순히 성찬 요소에 대한 신학적 이해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실패이기도 했다. 눈앞의 형제자매를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지체로 대하지 않은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
이 점은 바울이 마지막에 제시하는 매우 구체적인 처방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다(고전 11:33~34).
바울의 실제 해결책은 복잡하지 않다. 서로를 기다리고, 자신의 배를 먼저 채우는 것보다 형제자매를 살피라는 것이다. 정말 배가 고파 식사 자체가 목적이라면 집에서 먼저 먹고 오라고까지 말한다. 교회의 공동 식탁에서는 자신의 욕구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사람이 자기를 살피라”고 할 때 그 자기 성찰은 단순히 개인적인 죄책감 목록을 작성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나는 주님 앞에서 깨끗한가”라는 질문과 함께 “나는 주님의 몸에 속한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따라와야 한다.
성찬의 의미는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성찬의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바울이 강조한 본래의 무게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찬은 단순한 종교적 간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기념이며,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어지는 소망의 식탁이다. 또한 우리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드러내는 충성의 고백이며, 서로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됐다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공동체의 행위다.
동시에 성찬은 이미 이루어진 화해를 함께 누리는 교제의 식탁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더 보태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다 이루었다”는 복음의 선언을 떡과 잔을 통해 기억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 복음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서로를 외면할 수 없다. 한 사람은 풍족하게 먹고 다른 사람은 굶주리도록 내버려둔 채 “우리는 한 몸”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찬의 수직적인 의미와 수평적인 의미는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고백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에게 속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성찬의 식탁으로 나아갈 때 자신을 살피는 일은 필요하다. 죄를 가볍게 여기거나 회개 없이 성찬을 대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성찰을 오직 개인적인 내면 점검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희생을 기억해야 하고, 그분께 속해 있음을 다시 고백해야 하며, 동시에 자신의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봐야 한다.
성찬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이 사람들을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함께 물어야 한다. 바울의 경고가 향하는 곳은 바로 이러한 자리다.
성찬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충분히 자격 있는지를 증명하는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도 스스로 자격을 만들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함께 참여하는 식탁이다. 떡과 잔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보여주는 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이 얼마나 충분한지를 선포하는 표지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나아갈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가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며, 자신이 그분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고, 함께 식탁에 앉은 형제자매가 한 몸이라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성찬은 이미 완성된 복음을 다시 만들어내는 자리가 아니라, 그 복음을 기억하고 선포하며 함께 누리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