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폴 머레이 박사의 기고글인 ‘아르메니아 교회 108곳을 파괴한 뒤, 이제는 더 많은 흔적을 지우고 있다'(They destroyed 108 Armenian churches. Now they're erasing more)를 9월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폴 머레이 박사는 30년 이상 기독교 리더십에 헌신해 왔으며, 메릴랜드주 밀러스빌에 있는 라이트하우스 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국제 복음 전도자로 활동했으며 저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권력이 영토를 무력으로 장악할 수는 있어도, 진실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
현재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아르차흐(Artsakh)’라고 부르는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전역을 통제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이 지역에서 운영됐던 아르메니아계 자치정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2023년 9월 아제르바이잔의 군사 공세 직후 일주일 사이 10만 명이 넘는 주민이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떠나 아르메니아로 이동했다.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은 이들이 살던 마을뿐 아니라 묘지와 교회, 수도원 등 수세기에 걸친 아르메니아 기독교 문화유산이 자리한 지역까지 통제하게 됐다.
그러나 영토에 대한 통제권이 그 땅의 과거까지 마음대로 다시 쓸 권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역사적 기록을 온전히 보존해야 할 책임이 뒤따른다. 국제사법재판소(ICJ) 역시 2021년 아제르바이잔에 아르메니아 문화유산을 대상으로 한 훼손과 모독 행위를 방지하고 처벌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한 바 있다. 여기에는 교회와 예배 장소, 기념물, 묘지와 유물 등이 포함됐다.
간자사르와 다디방크를 둘러싼 역사 논쟁
최근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기독교 유산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2026년 9월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주선한 방문 일정에서 여러 국가와 국제기구 관계자들이 간자사르(Gandzasar)와 다디방크(Dadivank)를 찾았고,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 대통령의 외교정책 보좌관 히크메트 하지예프(Hikmet Hajiyev)는 이 수도원들을 고대 코카서스 알바니아(Caucasian Albania)의 기독교 유산으로 소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르메니아 측 학자와 단체들은 이에 반발하며, 두 수도원에 남아 있는 방대한 아르메니아어 비문과 하차카르(khachkar), 건축적 특징이 중세 아르메니아 기독교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관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고 있다.
코카서스 알바니아가 실제로 존재했던 역사적 왕국이라는 사실 자체는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남코카서스의 민족·교회사는 매우 복잡하며, 그 유산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해석을 채택하든 현존하는 비문과 묘비, 문헌과 건축 흔적을 제거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간자사르와 다디방크에는 다수의 아르메니아어 비문과 아르메니아 기독교 전통을 대표하는 하차카르가 남아 있다. 바로 그러한 물질적 증거가 있기 때문에, 이 유산의 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역사학과 고고학, 문헌학을 통해 다뤄져야 한다.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맞춰 과거를 단순화하는 순간, 문화유산은 역사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가 된다.
이미 사라진 108개의 유산
이 문제를 가볍게 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대규모 문화유산 파괴가 확인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코넬대와 퍼듀대 연구진이 참여하는 비영리 연구 프로젝트 ‘코카서스 문화유산 감시단(Caucasus Heritage Watch·CHW)’은 위성사진과 역사자료를 분석해 아제르바이잔의 나히체반(Nakhchivan) 지역에 있던 중세 및 근세 아르메니아 수도원과 교회, 묘지 108곳이 1997년부터 2011년 사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보고했다. 이는 CHW가 확인하고 평가할 수 있었던 해당 지역 아르메니아 문화유산의 약 98%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줄파(Julfa) 묘지다. 이곳에는 한때 수많은 아르메니아식 십자가 돌비석인 하차카르가 서 있었다. CHW는 줄파 묘지를 포함한 나히체반 지역 문화유산의 소멸을 위성영상과 역사자료를 통해 추적해 왔다. 이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이 사라진 문제가 아니다. 교회와 묘지, 비문은 한 공동체가 특정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물질적 기록이며, 그것이 사라지면 건축물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땅과 사람을 연결해주던 기억의 증거도 함께 사라진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도 이어지는 우려
이러한 우려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CHW는 2021년 이후 위성영상을 통해 이 지역의 수백 개 문화유산을 추적해 왔으며, 여러 아르메니아 교회와 묘지가 파괴되거나 심각한 훼손을 입었다고 보고했다. 2025년 보고서에서는 새로운 대규모 파괴 사례가 한동안 확인되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도, 일부 묘지와 19세기 교회에서 계속되는 손상을 기록했다.
2026년 4월에는 스테파나케르트의 성모 마리아 교회(Surb Astvatsatsin)가 같은 해 3월 초부터 4월 초 사이 철거된 사실을 위성영상으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교회는 아르메니아 사도교회가 2019년 봉헌한 건물이었다. 슈시의 역사적 묘지들에서도 훼손 사례가 보고됐으며, CHW는 18~19세기 아르메니아 묘비들이 남아 있던 가잔체초츠 묘지가 중장비 작업과 잔해 투기로 피해를 입었다고 확인했다.
이런 사례들이 중요한 이유는 문화유산 파괴가 과거의 기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과 공동체를 떠난 사람들에게 교회와 묘지, 수도원은 여전히 고향과 연결된 마지막 물리적 흔적일 수 있다. 그 흔적이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도시개발이나 건축물 철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진정한 힘을 가진 정부라면 불편한 역사까지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정치적 국경과 과거의 문화적 경계는 언제나 일치하지 않으며, 한 국가의 영토 안에는 자신과 다른 민족과 종교가 남긴 수많은 유산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국가 주권의 약화가 아니라 오히려 성숙한 국가가 보여줄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7세기 전 교회 벽에 새겨진 아르메니아어 비문은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영토 통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과거 어느 시기에 아르메니아 기독교 공동체가 그곳에서 예배하고 살아갔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언할 뿐이다. 그 증언을 보존하는 것이 문화유산 보호이며, 그것을 지우지 않는 것이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다.
독립적인 접근과 조사가 필요하다
국제사회가 요구해야 할 것은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투명성이다. 독립적인 문화유산 전문가와 국제기구가 관련 지역에 지속적이고 충분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아르메니아 교회와 수도원, 비문과 하차카르, 묘지와 필사본 등 남아 있는 유산의 현황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보존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이미 아제르바이잔에 아르메니아 문화유산에 대한 훼손과 모독을 방지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는 점도 이러한 요구에 법적 무게를 더한다.
외교관의 공식 방문 역시 독립적인 문화유산 조사를 대신할 수 없다. 정부가 설계하고 안내하는 일정은 어디까지나 해당 정부가 보여주고자 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자리일 뿐이다.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려면 고고학자와 역사학자, 비문학자와 보존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조사하고 서로 다른 자료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적 서사보다 증거가 먼저여야 한다.
세계 교회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이 문제는 단순한 지역 정치의 문제가 아니다. 간자사르와 다디방크를 비롯한 여러 수도원은 수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며 가족을 묻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을 고백했던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의 기독교적 역사가 훼손되거나 정치적으로 다시 쓰이는 문제는 아르메니아인들만의 관심사로 남을 수 없다.
다만 교회가 이 문제를 말할 때도 진실에 대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분노가 사실을 앞서서는 안 되고, 한 민족의 고통을 말하기 위해 다른 민족 전체를 악으로 규정해서도 안 된다. 문화유산을 보호하자는 요구는 새로운 증오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기록과 증거를 보존하고 모든 공동체의 역사적 존엄을 인정하자는 요구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은 때로 중립이 아닐 수 있으며, 문화유산이 실제로 파괴되고 있다는 독립적인 증거가 존재한다면 국제사회와 교회는 보존과 접근, 검증을 요구해야 한다.
영토는 통제할 수 있어도 역사는 소유할 수 없다
아제르바이잔은 현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실이 그 땅에서 살아온 모든 사람의 역사를 새롭게 정의할 독점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이 남긴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를 보존해야 하고, 아르메니아어 비문이 있다면 그대로 남겨야 하며, 묘지가 있다면 죽은 이들의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민족과 종교의 문화유산도 같은 기준으로 존중받아야 한다.
평화는 과거를 삭제하는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에게 불편한 역사까지 사실 그대로 인정할 때 지속 가능한 화해의 출발점이 마련될 수 있다. 나히체반에서는 이미 108개의 아르메니아 교회와 수도원, 묘지가 사라졌다는 위성조사 결과가 나와 있으며, 같은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돌은 말을 하지 못하지만, 비문과 교회, 수도원과 묘지는 사람들이 한때 그곳에서 살고 기도하며 사랑하는 이들을 묻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 증언을 지키는 일은 어느 한 국가나 민족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진실 자체를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