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디세우스》 감상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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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신성욱 교수

며칠 전, 방송에 자주 나오는 친구가 《오디세우스》(The Odyssey) 영화 봤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직 못 봤는데 곧 보러 갈 거라니까 빨리 보고 글 좀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대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할 때 읽어본 이후 세월이 많이 지났기에 줄거리 외엔 구체적으로 생각나지 않아서 ‘오디세우스에 관한 영상’을 몇 개 보고 영화관으로 갔다. 관람을 통해 느낀 영화의 장점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를 바탕으로 인간의 욕망, 유혹, 고난, 귀환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룬다. 강한 모험심을 가진 오디세우스와 일행이 거센 바다와 무시무시한 괴물, 세이렌의 유혹과 죽음의 위기를 가까스로 통과하는 과정이 스릴 넘치게 펼쳐진다. 용기뿐 아니라 교만, 두려움, 음모, 지혜, 절제와 같은 인간이 지닌 양면적 본성을 리얼하게 잘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가정으로 돌아가는 ‘귀환’이라는 여정이 따뜻함을 준다.

장장 3시간에 걸친 상영 내내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제우스의 법’이라는 단어 말이다. 이것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 왜냐하면 제우스가 나그네와 손님의 보호자이기 때문이다”라는 사고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이것을 ‘ξενία’(xenia), 곧 ‘손님 환대’(Hospitality)라고 불렀다.

이것은 성경 속에 나오는 ‘나그네 보호 사상’과 흡사하다. 구약의 나그네 보호 규정은 다음 성경 구절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학대하지 말라”(출 22:21). “나그네를 자기 같이 사랑하라”(레 19:33–34). “하나님이 나그네를 사랑하시므로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신 10:18–19). “나그네의 권리를 보호하라”(신 24:17–22).

두 사상과 규정이 동일해보이나 차이가 있다. 그리스의 논리는 “나그네를 잘 대하라. 제우스가 그들을 보호하기 때문이다”라는 것인 반면, 성경의 논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나그네였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이다. 그리스의 사상은 나그네가 제우스의 손님이기에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성경의 규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받은 대로 나그네를 대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 사상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준다. 당시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낯선 세 사람을 발견한다. 그들을 본 그는 달려가서 물을 가져다가 그들의 발을 씻게 하고 떡을 준비하고 송아지를 잡아 대접한다. 아브라함이 대접한 이들은 단순히 ‘여행객’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이 장면은 히브리서 13:2와 연결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그러니까 성경의 환대에는 아주 강력한 신학적 메시지가 있다. “내가 만나는 낯선 사람이 하나님일지 천사일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한다.

그뿐이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그네를 대접하고 사랑하는 이유에서 그리스의 논리와 성경의 논리는 크게 다름을 볼 수 있다. 그리스에서 나그네를 사랑하는 이유는 단순히 “언젠가 나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인 반면, 성경에서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에서 반복되는 논리이다.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였다 →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다 → 그러므로 너희도 나그네를 사랑하라.”

즉, “받은 은혜 → 기억 → 환대”라는 구조이다. 이 구조와 흐름을 생각하다 보니 본문 하나가 금방 떠올랐다. 지난 며칠간, 눅 17:11-19에 나오는 ‘열 명의 한센씨병 환자들’에 관한 본문을 계속 묵상하면서 설교문을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오디세우스》 영화를 관람한 후 설교문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내용을 더 첨가하게 되었다. 《오디세우스》에서는 환대받을 나그네가 도움 줄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예수님이 버림받은 이들을 직접 찾아가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것이 복음의 놀라운 역전이다. 기독교만의 독특성과 차별성이다.

정리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나그네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그네는 제우스의 보호 아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그들은 ‘제우스의 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경은 더 깊은 이유를 말한다.

“나그네를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도 나그네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그네 된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셨다.” 요일 4:10절을 떠올리게 하는 구절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영화《오디세우스》의 마지막 장면에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를 만나 자신이 ‘제우스의 법’을 깨뜨린 장본인임을 고백하며 후회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 결과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두 사람은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떠나간다. 이것은 ‘제우스의 법’이 잘 지켜지는 새로운 시대가 아들 ‘텔레마코스’를 통해 희망적으로 전개되기를 바라는 오디세우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이 영화의 가장 소중한 엔딩 장면으로 평가된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한센씨병 환자들처럼 우리의 보호와 사랑을 기대하는 이들이 주변에 아직도 많다. 찾아오는 나그네나 이웃 대접도 잘 못하는 우리인데, 한센씨병 환자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님처럼 먼저 찾아가서 도움도 주고 사랑을 베푸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