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이 아닌 이웃의 손을 잡으라: 고립의 시대를 넘어서는 참된 공동체의 회복

한나 레이프.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한나 레이프의 기고글인 '챗GPT가 우리를 그 어느 때보다 더 외롭게 만들고 있을까?'(Is ChatGPT making us lonelier than ever?)을 9월 6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한나 레이프는 미국 최대 규모의 여성 공공정책 단체인 ‘컨선드 위민 포 아메리카(Concerned Women for America)’에서 입법 전략가(Legislative Strategist)로 활동하고 있다. 댜음은 기고글 전문.

1980년대 말,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웬델 베리(Wendell Berry)는 손으로 글을 쓰는 방식을 버리고 컴퓨터를 사용하라는 주변의 강한 권유를 받았다. 그 압박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결국 「내가 컴퓨터를 사지 않으려는 이유(Why I Am Not Going to Buy a Computer)」라는 에세이까지 발표했다.

그 글에서 베리는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한 몇 가지 엄격한 기준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기술이 이미 존재하는 좋은 것을 대체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가족과 지역사회 안에서 맺는 관계도 포함됐다.

베리의 글쓰기 과정에는 아내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가 글쓰기의 효율을 높여줄지는 몰라도, 아내와 함께 나누던 작업 과정과 관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그는 컴퓨터를 사지 않았다.

당시에는 이런 선택이 다소 고집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 컴퓨터는 일상과 업무의 당연한 일부가 됐고, 아이폰과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가 그 뒤를 이었다. 이제 우리는 챗GPT(ChatGPT), 그록(Grok), 클로드(Claude)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시대까지 들어섰다.

책상 위의 컴퓨터에서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폰에서 소셜미디어의 온라인 공동체로, 다시 그곳에서 AI 동반자로 이동하는 동안 기술은 끊임없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대신할 새로운 방법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기술이 인간을 연결해 준 만큼, 동시에 더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더 연결됐지만 더 외로운 시대

2026년 가정연구소(Institute for Family Studies)의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 남성 상당수가 외로움과 고립감을 호소했다. 조사에서는 절반이 넘는 남성들이 외롭거나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고 느낀다고 답했고, 상당수는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거나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밀한 친구 관계 역시 약해지고 있었다. 적지 않은 남성들이 가까운 친구가 두 명 이하라고 응답했고,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답한 비율도 상당했다.

연구에서는 여러 생활 습관과 외로움의 상관관계도 살펴봤다. 청년 남성 가운데 높은 비율이 거의 끊임없이 소셜미디어를 이용하고 있었고, 비디오게임과 온라인 도박, 음란물 소비도 빈번하게 나타났다.

이런 통계가 곧 기술 하나가 외로움의 모든 원인이라는 뜻은 아니다. 외로움은 가족 구조와 경제적 상황, 연애와 결혼, 직장, 지역사회, 정신건강 등 수많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날의 기술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수준의 ‘혼자서도 가능한 삶’을 만들어냈다.

망치가 필요하면 이웃집 문을 두드릴 필요 없이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된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껴도 직접 말을 걸기보다 데이팅 앱에서 버튼 하나를 누르면 된다.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불편한 대화를 나누는 대신, AI 챗봇을 열어 즉각적인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더 편리해졌다. 그러나 바로 그 편리함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필요로 하는 순간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필요한 마찰까지 없애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관계에는 본래 불편함이 있다. 누군가에게 부탁해야 하고, 거절당할 수도 있으며, 오해를 풀기 위해 긴 대화를 해야 한다. 친구는 언제나 우리가 듣고 싶은 말만 해주지 않는다. 가족 역시 우리의 모든 판단을 긍정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 속에서 인간관계가 깊어진다. 서로 양보하고 기다리는 법을 배우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고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익힌다. 때로는 누군가의 충고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도 한다.

반면 기술은 점점 이런 ‘관계의 마찰’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원할 때 접속하고, 싫으면 끄면 된다. 상대방에게 미안함을 느끼거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AI 챗봇은 지치지도 않고, 약속이 있다고 먼저 떠나지도 않으며, 사용자가 원할 때 언제든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편리함인 동시에 위험일 수 있다. 기계가 인간관계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대체재가 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인간관계를 통해 배우는 인내와 책임, 갈등과 화해의 능력을 잃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더 큰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기술이 미치는 영향은 더욱 신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소셜미디어 공간에는 사이버 괴롭힘과 성착취, 신분 위장 사기, 딥페이크 음란물, 불법 약물 거래와 같은 직접적인 위험이 존재한다. 이와 함께 과도한 소셜미디어 사용이 불안과 우울, 신체 이미지 문제, 자해 등의 정신건강 문제와 연관될 수 있다는 우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AI 챗봇이 청소년의 정서적 삶에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문제도 나타나고 있다.

일부 청소년은 AI 챗봇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친구나 연인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현실의 인간관계에서는 얻기 어려운 즉각적인 공감과 끊임없는 관심을 AI에게서 경험하면서 정서적으로 깊이 의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AI는 인간처럼 책임을 지는 존재도 아니고, 진정한 의미에서 사용자를 사랑하거나 이해하는 인격체도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일부 비극적인 사건에서는 청소년들이 AI 챗봇과 장기간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해나 자살과 관련된 위험한 대화를 이어갔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관련 기업의 안전장치가 충분했는지를 둘러싼 법적·사회적 논쟁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사건 하나하나에서 AI가 어떤 정도의 인과적 역할을 했는지는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취약한 상태의 사용자가 AI에게 지나치게 의존할 때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만큼은 가볍게 넘길 수 없다.

AI의 가장 매력적인 특징이 가장 위험한 특징일 수도 있다 AI 챗봇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강력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사용자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은 반대한다. 친구는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할 수 있고, 배우자는 우리의 행동에 실망할 수도 있다. 부모나 목회자, 동료도 듣기 싫은 말을 건넬 수 있다.

AI는 기본적으로 사용자의 대화를 지속시키도록 설계돼 있다. 따라서 적절한 안전장치가 없다면 사용자의 생각을 지나치게 긍정하거나, 잘못된 전제를 충분히 교정하지 못하는 이른바 ‘아첨(sycophancy)’의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

이 점은 정신적으로 취약한 사용자에게 특히 위험할 수 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긍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 혼자 있으면 안 된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족에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진정한 관계에는 위로뿐 아니라 책임이 있다. 그래서 AI가 아무리 인간의 언어를 자연스럽게 흉내 낼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실제 공동체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웬델 베리의 질문을 다시 꺼내야 할 때

소셜미디어와 AI 챗봇이 곧 사라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기술을 모두 없애자는 식의 접근도 현실적인 답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웬델 베리가 오래전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일지 모른다.

이 기술이 인간의 삶에서 이미 존재하는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가, 아니면 그것을 대체하고 있는가? 가족과 더 가까워지도록 돕고 있는가, 아니면 한집에서도 각자 화면만 바라보게 만드는가? 지역사회와 연결해 주는가, 아니면 온라인 세계 안에서만 살아가게 하는가. 기술을 통해 일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 확보한 시간을 사람들과 보내고 있는가, 아니면 그 시간을 다시 또 다른 화면으로 채우고 있는가?

베리는 기술의 발전이 언제나 가족의 행복과 공동체의 건강, 하나님 사랑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때때로 “선을 긋기 어려운 곳에서 선을 긋는” 용기라고 말했다.

우리가 몇 년 사이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된 것들 가운데 일부는 사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외로움의 해답은 더 많은 연결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다

흥미롭게도 앞서 언급한 청년 남성 대상 조사에서는 신앙 기반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외로움과 불안, 우울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는 결과도 제시됐다.

이것이 단순히 “교회에 가면 모든 정신건강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에는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이 필요할 수 있으며, 교회 역시 그러한 도움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인간에게 실제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고 식사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관계가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결석하면 안부를 물어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힘들 때 함께 울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에서 교회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단순히 설교를 듣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건물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묘사한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몸의 지체가 되어 짐을 나누고, 서로 권면하고, 용서하며,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다.

AI가 성경 구절을 찾아줄 수는 있다. 기도문을 작성해 줄 수도 있고, 신학적 질문에 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AI는 우리와 함께 성찬에 참여할 수 없고, 병원 침대 곁에 실제로 앉아 손을 잡아줄 수도 없다. 장례식장에서 함께 울거나, 우리의 잘못으로 상처받았을 때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인격적인 관계도 맺을 수 없다.

기독교 공동체가 제공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실재적인 관계다.

기술을 버리는 것보다 경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해답은 모든 컴퓨터를 내다 버리거나 챗GPT 계정을 반드시 삭제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도록 허용할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다.

화면을 보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잠들기 전 한 시간만이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을 수 있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직접 만나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 필요할 때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도 이웃의 필요를 돌아볼 수 있다.

비디오게임을 하는 시간을 줄이고 가족과 보드게임을 할 수도 있다. 주일예배가 끝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보다 잠시 남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레시피가 생각나지 않을 때 검색창을 열기 전에 어머니에게 전화해 물어볼 수도 있다.

혼자 힘든 일을 견디고 있다면 AI와 몇 시간씩 대화하기보다 신뢰할 만한 친구나 목회자, 상담사에게 연락하는 편이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이런 행동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인다. 그러나 공동체는 바로 이런 사소한 행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편리함보다 사람을 더 필요로 한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스타그램과 챗GPT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도구가 인간관계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다.

기술은 빠른 답을 제공할 수 있지만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정보만 필요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받고, 용서받고, 책임을 지며, 다른 사람을 섬기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다.

기독교는 이런 인간의 필요를 단순히 외로움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깨어져 있으며, 복음은 그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될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래서 기술을 덜 사용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비워진 공간을 실제 사람과 공동체, 하나님을 향한 관계로 채워야 한다.

웬델 베리가 말했던 것처럼, 때로는 선을 긋기 어려운 곳에서 선을 그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기술 가운데 일부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고, 다시 사람을 향해 걸어갈 필요가 있다.

화면에서 눈을 들어 옆 사람을 바라보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함께 식사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 머물며,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삶을 선택하라.

AI가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그 관계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과 그분의 몸 된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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