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빠진 죄인, 혹은 분노한 죄인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분노한 죄인들의 손에 맡겨진 하나님"(God in the hands of angry sinners)을 9월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남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가, 오늘날처럼 ‘눈을 찌르는 날카로운 막대기’처럼 고통스럽게 다가온 적은 드물 것이다.

1741년 7월 8일, 코네티컷주 엔필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 유명한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빠진 죄인(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을 설교했다. 전해지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회중의 울음과 탄식이 너무 커 설교가 제대로 이어지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날 같은 설교가 선포된다면 비슷한 소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이 울부짖는 이유는 전혀 다를 것이다.

평소 온유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현대 청중이라면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갈 법한 매우 불편한 메시지를 거침없이 던진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도 정확히 짚는다.

“지옥에 대해 듣는 거의 모든 자연인, 곧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자신만은 그곳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속인다.”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차라리 지옥에 가겠다”고 가볍게 말한다. 그러나 영원한 심판이 실제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다면, 그것을 그렇게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에드워즈의 설교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십니다”라는 메시지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도 강렬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고자 한 핵심은 분명했다. 인간은 단순히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먼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를 말하기 전에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가. 그는 청중을 절망 속에 버려두지는 않았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구원 역시 선포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똑같이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피로 죄를 씻어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고 있다는 복음의 소망을 전했다.

문제는 오늘날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데 있다.

우리는 영원한 심판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어떤 형태의 고통과 징계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고난이 찾아오면 오히려 에드워즈의 설교 제목을 뒤집어 하나님을 ‘분노한 죄인들의 손’에 올려놓고 따지기 시작한다.

필자 역시 그런 일을 너무 자주 해왔기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을 향해 분노했던 시간

필자는 아주 젊은 나이에 첫 아내를 암으로 잃었다. 그 과정이 그녀에게 얼마나 혹독했는지에 대해 이전에도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 필자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상처를 떠올릴 때면 때때로 같은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든다.

그러던 중 C. S. 루이스가 아내 조이(Joy)를 암으로 잃은 뒤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served)』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필자는 비슷한 고통을 겪은 루이스라면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책을 구해 읽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 책이 너무 싫었다. 필자가 찾고 있던 답을 전혀 주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침실 한쪽에 내던져 놓고 몇 달 동안 다시 펼쳐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필자는 깨달았다. 답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필자가 그 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필자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때와 같은 미성숙함이 남아 있다.

고난을 바라보는 ‘영적 기어 변속’

루이스가 던진 핵심적인 통찰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고난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때로는 오히려 더 두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악한 존재라면 변덕이나 기분에 따라 고통을 멈출 수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선한 의사가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수술하고 있다면, 환자의 애원 때문에 필요한 수술을 중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이를 외과의사의 비유로 설명했다. 의사가 정말 환자의 회복을 원한다면, 고통스럽더라도 필요한 절개를 끝까지 해야 한다. 중간에 멈춘다면 그때까지의 고통이 오히려 헛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고난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하나님의 침묵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관점을 제공한다.

예레미야애가의 탄식처럼 우리는 때때로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셨다”(애 3:44)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루이스의 비유를 빌리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선하신 의사는 여전히 수술을 계속하고 계실 수 있다.

이 생각은 시편 기자의 고백과도 맞닿아 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시 119:71, 75)

물론 이런 말씀은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필자 역시 그 점을 안다.

루이스는 이 질문도 정면으로 다뤘다. “정말 이런 극심한 고통이 필요하다고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지만 무겁다. 고통이 실제로 존재하는 이상, 하나님이 완전히 선하시다고 믿는다면 그분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고통을 허락하신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루이스 특유의 날카로운 유머는 이 지점에서도 등장한다. “하나님은 선하시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사실상 이렇게 되묻는다. 선한 치과의사라고 해서 치료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 비유는 거칠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다.

믿는다는 것은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첫 아내를 떠나보낸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필자는 루이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전보다 훨씬 잘 이해하게 됐지만, 여전히 야고보서의 말씀을 살아내는 일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이 말씀을 설명하는 것과 실제 고난 속에서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새로운 아픔이 찾아올 때면 필자는 여전히 너무 쉽게 하나님을 자신의 분노한 손에 올려놓고 따져 묻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는 분명히 생겼다. 과거에는 기도의 초점이 주로 “이 고통을 없애주십시오”에 있었다면, 이제는 조금씩 “고통이 사라지지 않더라도 주님을 신뢰하게 해주십시오”라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다.

필자는 머시미(MercyMe)의 찬양 ‘그리 아니하실지라도(Even If)’가 담고 있는 고백을 떠올리곤 한다. 하나님께서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당장 원하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실 때에도 여전히 소망을 하나님께 두겠다는 고백이다.

이것이 결코 쉽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은 고통 속에서 슬퍼할 수 있고, 울부짖을 수 있으며, 하나님께 질문할 수도 있다. 성경 자체가 그런 탄식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신앙은 고통 그 자체보다 더 큰 무언가에 소망을 두도록 우리를 부른다.

진짜 질문은 불같은 시련이 찾아올 것인가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것이 올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 모든 시련을 즉시 없애주실 것인가도 핵심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그 시련의 불길 속에서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할 만한 분으로 믿을 수 있는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다윗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이 의롭다고 고백할 수 있다. 바울처럼 현재의 고난 너머에 있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바라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니엘서의 세 히브리 청년들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실 수 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그분에게서 돌아서지 않겠다.

이 고백은 고난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다. 아픔을 부정한다는 뜻도 아니고, 슬픔을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으로 취급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현실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그 현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마지막 판결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필자는 여전히 이 진리를 쓰는 것이 살아내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큰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버거울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오래전 필자가 루이스의 책을 침실 한쪽에 내던졌던 것처럼, 이런 이야기를 당장 밀어두고 싶을 수도 있다.

그 마음을 필자는 충분히 이해한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답을 즉시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질문만은 마음 한편에 남겨둘 수 있을 것이다.

고난이 끝나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신뢰할 만한 분이실 수 있는가? 필자는 이제 그 질문 앞에서 예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그러나 조금 더 확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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