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결신을 넘어 온전한 복음으로: 교회를 떠난 이들을 향한 어느 변증가의 고백

스티븐 제임스(오른쪽). ©Facebook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스티븐 제임스의 기고글인 '나는 교회에서 자랐지만,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는 몰랐다'(I grew up in Church. I didn't know why I needed Jesus)를 9월 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티븐 제임스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세븐스프링스에 위치한 세븐스프링스침례교회(Seven Springs Baptist Church)의 담임목사이며, 리버티대학교 롤링스 신학대학원(Rawlings School of Divinity)에서 응용 변증학(Applied Apologetics)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목회자이자 변증학 연구자로서 그는 오늘날 문화 속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질문과 경쟁하는 진리 주장에 직면한 그리스도인들이 깊이 있는 성경적·신학적 논의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데 힘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교회에서 자랐다. 그러나 교회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곧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거의 매주 주일마다 예배당에 있었고,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알고 있었으며, 성경의 내용과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는지도 익숙하게 들으며 자랐다. 교회 건물이 동네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듯, 기독교 역시 필자가 성장한 세계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셀 수 없이 많이 들었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초대의 이면에 남겨진 질문

교회의 호소는 대개 이미 내려진 결론에서 시작됐다. “당신에게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매주 교회에 앉아 있던 어린 필자에게 그 결론 아래 놓인 근본적인 질문은 늘 답 없는 메아리처럼 남아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해결할 수 있을 만큼 필자 안에 무엇이 잘못돼 있다는 말인가.

이런 기본적인 설명이 빠진 초대는 필자에게 이해를 돕는 설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절차처럼 느껴졌다. 영접기도를 따라 하고, 앞으로 나가고, 결신하고, 정해진 칸에 표시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필자가 그 초대에 저항했던 것은 기독교를 치밀하게 조사한 뒤 거짓이라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기독교가 그리스도께서 해결하러 오셨다고 말하는 문제가 실제로 필자 자신의 문제라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필자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했던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진심이 설명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자신의 내면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청년에게 해답만 반복해서 제시하면, 어느 순간 그것은 복음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결신’이라는 결과를 얻으려는 과정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는 필자를 포함한 목회자들이 스스로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이끄는 일에 너무 서두른 나머지,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이 질문을 모호하게 남겨두지 않는다. 바울은 인간의 상태를 분명하게 선언한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말한다. 이것은 삶이 무너졌을 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생이 잘 풀리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처한 근본적인 상태에 대한 진술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해답 역시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밑바닥까지 내려갔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 8).

필자가 어린 시절 들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자주 들었던 것은 이런 설명이 빠진 결론뿐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결론을 한쪽으로 밀어두는 일은 어린 청년에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님 없이도 삶이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때

그래서 필자는 그 결론을 한쪽으로 밀어두었다. 극적으로 신앙을 버리겠다고 선언하거나 공개적으로 배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교회 밖에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했고 교회 출석을 중단했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따라 보험업에 뛰어들었고 훗날 그 대리점을 인수했다. 결혼했고, 직장과 수입, 가정과 미래 계획을 중심으로 평범한 성인의 삶을 살아갔다.

기독교 변증가들이 언제나 솔직하게 인정하지는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한동안 필자의 삶은 하나님이 없어도 꽤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사업은 잘됐고 청구서는 제때 낼 수 있었다. 필자가 내린 결정들도 대체로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누군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믿느냐고 물었다면 필자는 꽤 정확하게 답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배운 것을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일을 멈췄을 뿐이었다. 필자가 만들어 놓은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필자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해진 시점은 삶이 어려워진 뒤가 아니었다. 건강할 때도 그분이 필요했고, 사업이 잘될 때도 필요했으며, 결혼식 날에도 필요했다. 로마서 3장이 말하는 인간의 상태는 위기가 닥쳐와야 비로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모든 순간에도 그 진리는 여전히 필자에게 해당됐다.

삶이 내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때

40대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이미 수십 년 동안 교회 밖에서 자신의 삶을 구축해 온 상태였다. 직업과 책임, 인간관계가 있었고,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자신의 힘으로 삶을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많았다.

그러다 삶이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심각한 의료적 위기가 닥쳐 자신의 유한한 생명과 마주해야 했고, 몇 달 동안 회복에 매달려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생활이 끝났으며, 뒤이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큰 재정적 위기까지 찾아왔다.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삶의 여러 부분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사건의 세부사항이 아니라, 그것들이 필자에게 드러낸 사실이었다. 필자가 오랫동안 삶을 지탱하기 위해 의지해 왔던 것들, 곧 자신의 능력과 건강, 재정적 안정, 열심히 노력하면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하나씩 대체재로서의 힘을 잃었다. 오랫동안 그것들은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고난들이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위기가 필자 안에 없던 ‘그리스도를 향한 필요’를 새롭게 만들어낸 것도 아니다. 필자는 건강하고 커리어가 안정적이며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아래 있다고 생각하던 때에도 여전히 그리스도가 필요했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였다.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직면하지 않고도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무너진 것이다.

전도서 7장 2절은 축하 카드에는 좀처럼 적히지 않을 말을 전한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필자는 언제나 추상적으로 삶이 연약하고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과 한계를 실제로 마주하고 나자 그것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라고 기도한다. 필자 역시 누구나 그렇듯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남은 날을 실제로 헤아리기 시작했다.

고난 자체가 복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현재 기독교 변증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필자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다. 필자가 경험한 시련 가운데 어떤 것도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입증하지는 않는다.

만약 필자가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기독교가 진리라고 믿게 됐다고 말한다면, 변증학이 경계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신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것과 실제로 객관적인 사실인 것을 혼동하는 오류다.

고난이 한 일은 그보다 더 제한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위기가 무너뜨린 것은 필자의 ‘그리스도를 향한 필요’가 아니었다. 로마서 3장이 말하듯 그 필요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위기가 무너뜨린 것은 복음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로도 자신의 힘만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필자의 확신이었다.

진리를 분명하게 말해준 한 친구

수술과 이혼, 그리고 이어진 재정적 어려움을 겪은 뒤, 은퇴한 목사이자 필자의 개인적인 친구였던 한 사람이 꼭 필요한 말을 건넸다.

그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위해 필자의 생명을 살려주셨다고 믿으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직접 말했다. 오랜 목회 경험은 그의 말하는 방식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정해진 대본을 읽거나 기계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를 오래 알고 삶의 형편까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지극히 인격적이고 직접적인 권면이었다.

그는 필자를 로마서 10장의 말씀 앞으로 이끌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13).

필자의 기억에 남은 것은 세련된 전도 기술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며 살아왔고, 필자가 어떤 삶을 지나왔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한 친구의 사랑이었다. 필자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해 꾸밈없이 진실하게 말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동시에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 그 말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그 우정은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이 대화는 필자가 교회에서 자라며 들었던 수많은 말과 분명히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필자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대개 정해진 공식을 건네는 낯선 사람이거나 깊은 관계가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필자를 알고 있었다. 필자가 살아온 삶과 겪은 일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을 건넸으며, 필자를 ‘또 하나의 결신자’로 만들기 위해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믿으라는 성경의 부르심을 가지고 필자에게 직접 다가왔다.

그러나 그 순간이 의미하지 않는 것도 분명히 해야 한다. 필자가 인생의 바닥을 경험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곧 그리스도께 나아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허무함 자체가 회심은 아니다. 상황과 환경이 필자를 비워냈다면,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복음이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성경의 말씀을 깊이 알고 동시에 필자를 잘 알았던 한 친구를 통해 분명하게 선포됐다.

필자는 40대에 그리스도께 돌아오기까지 기독교의 언어와 개념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인 ‘왜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한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을 보냈던 셈이다.

시편 73편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준다. 물론 아삽의 상황은 필자의 경우와 다르다. 그는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신앙인으로서 자신이 고난받는 동안 악인이 형통하는 현실을 두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경험을 이해하게 되는 과정은 여전히 중요한 교훈을 준다.

아삽은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라고 고백한다.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그 상황을 바라보는 해석이었다.

고난은 스스로 자신의 의미를 설명하지 못한다. 경험은 반드시 그 경험보다 더 큰 진리의 빛 아래에서 해석돼야 한다. 아삽에게 그 관점의 전환은 성소에서 찾아왔고, 필자에게는 성경을 깊이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잘 아는 한 친구가 그 역할을 했다.

교회를 떠난 이들을 향하여

필자는 이 이야기를 자주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이야기할 때마다 다른 가족들에게도 똑같은 결말이 보장되는 것처럼 말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필자에게는 그런 약속을 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교회 안에는 필자처럼 교회에서 자라다가 떠나버린 아들과 딸, 형제와 자매, 친구를 위해 조용히 걱정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누군가 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그가 배웠던 모든 진리까지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친구가 마침내 필자에게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전했을 때 필자는 완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들었던 성경 말씀이 그 당시 곧바로 회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필자에게 기독교의 언어와 개념을 남겨두었다. 필자는 단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동시에 교회 역시 자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말하면서 정작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들이 자신이 듣고 있는 초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초대가 곧 복음의 전부는 아니다. 복음에는 애초에 그 초대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죄와 심판, 그리고 우리가 아직 연약하고 죄인 되었을 때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다. 이 핵심을 생략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복음을 더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왜 그것이 자신과 관계있는지 알지 못한 채 더 쉽게 외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와, 떠난 이들을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당황하지 말고 섣불리 단정하지 말라. 얄팍한 설명으로 그들을 뒤쫓지도 말고, 교회를 떠났다는 이유로 그들이 아무것도 듣지 못했거나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그러나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초대만 기계적으로 반복해서도 안 된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필자의 친구가 그랬던 것처럼,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알고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분명하고 신실하게 선포해야 한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을 들은 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떠나 다시는 함께 다니지 않았다. 그때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그 친구가 필자의 곁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 필자는 참으로 많은 다른 곳에서 답을 찾았다. 일과 결혼생활, 스스로 안정된 삶을 구축하는 평범한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것들이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필자가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마침내 누군가가 그 질문에 진리로 답하도록 마음을 열었다.

수년이 흐른 지금 필자는 강단의 반대편에 서 있다. 과거의 필자처럼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말만 듣고 있을 수많은 청년들을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설명되지 않은 초대를 한쪽으로 밀어둔 채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될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필자는 스스로 묻는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미안해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지를 분명하게 말할 준비가 돼 있는가.

언젠가 그 질문이 다시 그들의 마음에 떠오를 때, 단순히 “교회로 돌아오라”고 초대하는 데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복음이 말하는 인간의 문제와 하나님의 해답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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