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전쟁터에서 눈을 돌리라: 시대의 소음 속에서 영원을 묻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성경의 지혜서는 오늘날의 문화전쟁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The wisest book in the Bible has a question for our culture war)를 8월 2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상륙정이 아닌 푹신한 의자에 앉아 노르망디 해변을 다룬 전쟁 영화를 보고 있었다. 1944년 6월 6일, 해가 지기 전까지 약 4,400명의 연합군 병사가 목숨을 잃은 날이었다. 그 거대한 희생 앞에서 필자의 삶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히틀러를 물리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엄청난 희생 앞에서 개인의 비극이 과연 어떤 무게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문득 필자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의 고통은 정말 그보다 ‘덜한’ 것이었을까.

임상심리학자로 살아온 35년은 필자의 기억 속에 결코 닫을 수 없는 방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납치범이 붙잡히기 전까지 수년 동안 학대당했던 필자의 첫 환자인 소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이웃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던 여성, 교통사고로 열 살 난 딸을 잃고 오열하던 아버지가 그 안에 있다. 그리고 필자가 이른바 ‘방금 알게 됐어요’라고 부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다. “파킨슨병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암이래요.” “손자가 약물 과다복용으로 쓰러졌어요.” 필자가 오랜 세월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아온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 아래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흐르고 있다. 가족들로 붐비는 해변 위로 번지는 오렌지빛 저녁노을, 파도를 가르며 프리스비를 쫓아가는 개, 결혼식 날의 첫 춤, 아이가 처음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있다. 불타는 건물 속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낯선 이가 있는가 하면, 딸의 다섯 번째 생일을 위해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도 있다. 모두 사랑이 만들어내는 기쁨의 순간이다. 사랑에는 지나치게 작거나 지나치게 큰 것이 없으며, 고통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끝없이 따라다니는 역설이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전쟁이 마을을 파괴하고 있는데, 자동차 엔진을 교체해야 한다거나 아이가 독감에 걸렸다는 이유로 힘들다고 말해도 되는 것일까. 천국에서는 비극에도 등급을 매길까. 굶주리는 아이의 고통은 10점이고 고장 난 자동차는 1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 답을 아는 분이 있다면,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의 가장 거대한 순간과 가장 개인적인 순간을 모두 아시는 하나님일 것이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 긴장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전쟁과 심판의 거대한 역사 한가운데 계시는 동시에, 간음하다 붙잡혀 사람들 앞에 끌려온 한 여인을 향해서도 자비를 베푸신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지만, 요한계시록은 동시에 그리스도를 악을 심판하시는 왕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거대한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사랑과 비극, 자비와 정의, 평화와 갈등을 한꺼번에 품으면서도 갈가리 찢기지 않을 수 있는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에게 그 해답의 일부는 전도서에 있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1-8)

얼핏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삶에는 여러 계절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전도서의 질문은 훨씬 날카롭다. 단순히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때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고 있는가를 묻기 때문이다.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는 같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싸워야 할 때를 아는 만큼 싸움을 멈춰야 할 때도 알고 있는가. 울 때와 웃을 때가 따로 있다면, 이미 지나간 비극이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붙잡고 마땅히 웃어야 할 순간까지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할 때가 있다면, 어떤 관계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붙잡는 것보다 건강한 경계를 세우는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 않은가. 허무는 때를 지나 세우는 때가 찾아왔는데도 여전히 과거의 전쟁만 되새기며 살아갈 수도 있고, 반대로 말해야 할 때 침묵할 수도 있다. 누군가 장례를 치르고 있을 때 곁에 서주고,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앉아주며, 항암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이웃을 위해 자신의 하루를 내어주는 것이 그 계절이 요구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계절을 알아차리는 것은 절반에 불과하다. 더 어려운 질문은 그 계절에 맞는 생각과 행동, 그리고 태도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히틀러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쌓여 있는 청구서와 울음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돌보며 평범한 화요일을 버텨내는 데 필요한 용기는 서로 다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어떤 싸움 앞에 서 있는지를 분별하는 일이다. 막히는 도로나 상대방의 차가운 문자 한 통 같은 작은 일에는 필요 이상의 힘을 쏟으면서, 정작 정말 중요한 문제를 위해 사용할 힘은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다. 사소한 문제는 절대적인 문제처럼 붙잡으면서 정작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은 놓쳐버리는 것이다.

문화전쟁 속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

오늘날 우리의 공적 논쟁을 바라보면 이런 질문은 더욱 중요해진다. 정치권과 교육 현장, 가정과 교회 안에서 성과 젠더, 정체성, 스포츠 참여, 공공시설 이용과 같은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당사자들에게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볍게 취급할 수는 없다. 동시에 모든 논쟁을 문명의 존망이 걸린 최후의 전투처럼 다루는 태도 역시 경계해야 한다.

어떤 사회적 쟁점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궁극적인 문제라는 주장은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신학적 확신을 가지고 논쟁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존엄을 지우거나 상대를 하나의 정치적 표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늘날 문화전쟁이 교회까지 갈라놓는 모습을 보면, 필자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논쟁하고 있는 개별 정책이나 용어보다 더 깊은 곳에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을 단순히 정치적 정체성이나 욕망, 사회적 역할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깨어진 존재이며, 동시에 구속과 회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과 정체성,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논쟁 역시 단순한 정당정치나 문화적 유행의 차원만으로 다룰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문제가 성경적 인간관과 연결돼 있다고 해서 모든 개별 논쟁을 동일한 무게로 취급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고,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며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 세대의 가장 중요한 싸움은 지금 가장 크게 소리치는 전투가 아닐 수도 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

그래서 오늘따라 성경의 말씀이 더욱 긴급하게 들린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바울이 말한 ‘지금’은 세상의 모든 논쟁이 끝난 이후를 뜻하지 않는다. 자신의 정치적 진영이 승리한 뒤도 아니고, 역사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이후도 아니다. 바로 지금이다. 바울은 또 “너희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롬 13:11)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우리 편이 문화전쟁에서 승리했는가’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모든 소음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훨씬 단순하면서도 훨씬 무거운 말씀으로 정리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요한 역시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기준으로 제시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어쩌면 우리는 짧은 인생의 너무 많은 시간을 잘못된 전쟁터를 바라보는 데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사소한 문제에 모든 힘을 쏟느라 정작 정말 싸워야 할 영적 싸움과 사랑해야 할 사람, 순종해야 할 말씀을 놓쳐버렸을 수도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며, 때가 이르렀다. 세상이 순간순간 새로운 논쟁거리를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것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더 오래되고 더 근본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계신다: “너는 나를 아느냐. 너는 내 말씀을 아느냐. 그리고 너는 내 뜻을 행하겠느냐.”

소음은 크고 시대는 빠르게 흘러간다. 그렇기에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이 질문에 답해야 할 때인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때이고, 그분의 뜻을 구할 때이며, 그분을 따를 때다.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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