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데일리인터내셔널(CDI)은 하비 키야니 박사의 기고글인 ‘기독교의 연합, 왜 깊은 상호성으로 이어지지 못하는가'(Christian unity should be deeply mutual but rarely is)를 8월 2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키야니 박사는 말라위 선교사이자 신학자로서 CMS(영국) 개척자 미션 트레이닝의 아프리카 기독교 프로그램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몇 달 전 ‘다문화 하나님 나라’ 수업을 가르치던 중, 필자는 그 이후로 계속 마음에 남아 있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다:
“우리의 구조는 곧 우리의 신학이 구현된 모습이다. 구조는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과 교회, 권위, 그리고 서로에 대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형성되지 않는다. 신학은 언제나 권력이 작동하는 특정한 사회적·역사적 맥락 속에서 해석되고 표현되며 제도화된다. 그렇기에 ‘상호성(mutuality)’에 대한 질문은 단순한 조직이나 행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신학적인 문제다. 만약 우리의 구조가 진정한 상호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동역’에 대한 어떤 화려한 수사도 그 편협한 신학을 감출 수 없다.”
그렇다면 상호성이 사라졌을 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론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말이다. 권한은 전혀 나누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동역을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교회가 되는가. 사람들을 따뜻하게 환대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함께 살아갈 방식과 미래를 형성하는 일에는 그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대답은 분명하다. 동역(partnership)은 서서히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된다.
1. 동역은 ‘의존’으로 전락한다
한쪽이 지속적으로 자금을 대고, 의제를 설정하며, 성공의 기준을 정하고, 결과까지 평가한다면 동역은 결국 의존 관계로 변한다. 겉으로는 협력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힘의 불균형이 점점 고착되는 것이다. 한쪽은 꿈을 꾸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수행하며, 한쪽은 지시하고 다른 한쪽은 보고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런 방식은 효율적일 수 있고 때로는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지체가 기여하고, 모든 은사가 존중받으며, 상호 의존 속에서 권위가 행사되는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비전과는 거리가 멀다. 의존적인 구조가 프로그램을 유지시킬 수는 있어도, 진정한 동역과 상호성을 길러내지는 못한다.
2. 환대는 ‘온정주의’로 변질된다
권력을 나눌 의지 없이 베푸는 환대는 쉽게 온정주의(paternalism), 곧 가부장적 통제로 변질된다. 교회와 단체가 진심으로 다양성을 환영하고 참여의 공간을 열어줄 수는 있다. 타문화권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들의 존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중요한 결정권은 여전히 기존 지도층이 쥐고 있을 수 있다.
리더십과 예산, 비전과 신학적 방향은 여전히 ‘전통적인 주인’들의 손에 머물고, 새로 온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그어놓은 경계 안에서만 기여하도록 요구받는다. 환대는 “당신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호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는지 함께 분별하도록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둘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권한을 공유하지 않는 환대는 ‘포용’이라는 아름다운 언어 아래 불평등한 관계를 장기적으로 고착시킬 위험이 있다.
3. 다양성은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다양성이 눈에 띄게 찬양받으면서도 구조적으로 구현되지 않는다면, 결국 장식품에 머물게 된다. 많은 교회가 자신들을 다문화 교회라고 소개한다. 예배에는 여러 문화가 반영되고, 홈페이지에는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얼굴이 등장하며, 콘퍼런스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강사들이 선다.
그러나 리더십과 전략적 의사결정, 신학적 방향성의 문제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 조직도와 리더십 명단을 살펴보면 언제나 비슷한 소수의 사람들이 권위를 쥐고 있고, 동일한 전제들이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며, 같은 목소리들이 ‘신실함이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을 수 있다.
어떤 집단을 대표하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영향력이 없는 대표성은 상징적인 구색 맞추기(tokenism)에 머물 위험이 있다. 겉으로는 변화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권력 구조는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다.
4. 교회의 신학은 빈곤해진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한 부분이 다른 지체에게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교회의 신학은 가난해진다. 약 50년 전 아프리카 신학자 존 음비티(John Mbiti)가 서구 기독교인들을 향해 던진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당신들의 신학을 압니다. 문제는 당신들도 우리의 신학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 글로벌 기독교의 여러 영역에도 여전히 무겁게 다가온다.
상호성은 단순히 인력을 교환하거나 자원을 나누는 수준을 넘어선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상호 신학적 배움’이 필요하다. 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편교회가 필요로 하는 고유한 은사와 통찰이 있다.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유럽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한 지역이나 문화권도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홀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상호성이란 기존의 신학적 중심을 또 다른 중심으로 단순히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어느 한 부분도 스스로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배우고 서로의 목소리에 의해 교정될 때 비로소 교회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갈 수 있다.
5. 청년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어쩌면 ‘가짜 상호성’이 치르는 가장 큰 대가는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신뢰를 잃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회가 정의와 포용, 다양성과 동역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동시에 실제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지도 날카롭게 관찰한다.
누구의 아이디어가 미래를 결정하는지, 중요한 순간에 누구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지, 무대 위에 누가 서는지만이 아니라 실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회의실에는 누가 초대되는지를 살핀다. 그리고 우리의 화려한 수사와 실제 구조 사이의 간극을 빠르게 알아챈다.
권한은 나누지 않으면서 다양성만 찬양하는 교회의 모순을 가장 먼저 포착하는 이들이 바로 다음 세대다. 그 결과 적지 않은 청년들이 교회의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되지 않는 화해와 연합의 메시지를 더 이상 쉽게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영향력’이 거세된 포용은 가짜 상호성이다
필자는 영향력 없는 포용이 철저한 가짜 상호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확신하게 됐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변화시키거나 형성하도록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얼마든지 ‘포함’시킬 수 있다. 과거부터 물려받은 권력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양성을 찬양할 수도 있다. 메뉴는 이미 내부에서 모두 정해놓은 뒤 다른 이들을 식탁으로 초대하며 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상호성이 아니다.
진정한 상호성은 서로에 의해 변화될 의지를 가질 때 시작된다. 리더십을 공유하고, 서로에게 배우며, 권위를 협력적으로 행사하고,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모든 지체가 단순히 자리를 채우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상호성은 결국 권력의 문제와 연결된다. “당신도 여기 있을 수 있다”는 말에서 멈추지 않고, “당신의 존재와 통찰이 우리가 앞으로 어떤 공동체가 될지를 실제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이미 되돌릴 수 없을 만큼 글로벌(global)해졌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우리의 구조와 제도, 그리고 리더십의 방식 역시 그 현실에 맞게 기꺼이 글로벌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