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의 신앙이 화요일의 삶이 되기까지: 의심과 진리 사이를 걷는 Z세대

나오미 앤더슨.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나오미 앤더슨의 기고글인 'Z세대는 신앙을 잃는 것이 아니라 확신을 잃고 있다'(Gen Z isn't losing faith — they're losing confidence)를 8월 16알(현지시각) 게재했다.

나오미 앤더슨은 베리티 컬렉티브(Verity Collective)의 공동설립자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Z세대가 신앙을 떠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어쩌면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관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여전히 교회에 나오고 있다. 그들은 섬기고, 소그룹에 참여하며, 친구들을 교회로 데려오고, 윗세대보다 더 자주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2026년 6월 발표된 라이프웨이 리서치(Lifeway Research)의 ‘제자도 현황(State of Discipleship)’ 연구에 따르면, 교회에 출석하는 Z세대는 조사 대상 가운데 어떤 세대보다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6개월 동안 교회에 출석하는 평균적인 Z세대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앙 이야기를 거의 7차례 나눴다. 반면 61세 이상 교인들의 경우 그 횟수는 3차례에 그쳤다. 적어도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에서 Z세대는 결코 침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같은 연구에서는 우려스러운 부분도 발견됐다. Z세대는 영적 성숙도를 나타내는 8가지 지표 가운데 두 가지, 즉 ‘믿음의 실천’과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기’에서 다른 모든 세대보다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기’ 항목에서 베이비붐 세대 이상이 100점 만점에 66.9점을 받은 반면, Z세대는 46.0점에 머물러 연구에서 가장 큰 세대 간 격차를 보였다. 여러 핵심 신학적 신념에 대한 동의율 역시 낮게 나타났다. 거의 절반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때 하나님의 개입을 의심한다고 답했으며, 힘든 시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는지 혹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실지를 의심할 때가 있다고 응답했다.

젊은 신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삶이 어려워질 때 주님을 신뢰한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 믿음은 그들을 주일에 교회로 이끌고 월요일에는 예수님에 관한 대화를 시작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어려운 질문은 ‘화요일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기도는 응답되지 않고 상황은 좀처럼 변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시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이러한 모습 가운데 일부는 단순히 그들이 아직 젊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들이 성장한 문화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대는 오랫동안 진리는 개인적인 것이라는 메시지를 들어왔다. “너만의 진리를 살아라”, “너에게 맞는 것을 찾아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이 진리인지 강요하지 마라” 같은 말들이다. 그러던 그들이 어느 날 ‘모든 사람’을 위한 진리라고 자신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만난다. 절대적인 것을 의심하도록 배워온 사람이라면 어느 날은 예수님을 담대하게 이야기하면서도, 다음 날에는 자신이 그렇게 확신해도 되는지 스스로 의문을 품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필자는 그 간극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필자 역시 한때 바로 그 사이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17살 때 필자는 집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주일에 누군가 필자에게 무엇을 믿느냐고 물었다면 꽤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이나 그분의 말씀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선택들을 하며 살았다. 밤새 파티를 즐긴 뒤 옷을 챙겨 입고 교회에 가기도 했다. 전날 밤 필자가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는 아무렇지 않게 예배당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여전히 주님을 믿었다. 다만 그 믿음이 주일 이후의 삶을 빚어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을 계속 공허하게 만들던 이른바 ‘자유’를 몇 년 동안 좇은 끝에, 22살이 된 필자는 결국 유치장 독방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필자의 바깥에 실제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진지하게 묻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필자는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진리는 필자가 만들어내거나 순간의 감정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이 필자에게 깊은 의미를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자신이 수많은 진리 가운데 하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 자신이 곧 진리라고 선언하셨다.

필자의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몰랐다는 데 있지 않았다. 필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진리인 것처럼 살아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의심과 씨름하는 청년들을 볼 때, 그들의 신앙에 무언가 잘못됐다고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다. 성경은 믿으면서도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공간을 내어준다. 마가복음 9장에서 한 아버지는 아들이 낫기를 바라며 예수님께 나아와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한 직후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는다. 믿음과 의심이 한 문장 안에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내치지 않으셨다.

질문과 씨름하는 것은 신앙을 저버리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질문은 반드시 단단한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해진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말씀이다

해답은 또 다른 프로그램이나 더 정교한 전략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데 있다. 몇몇 성경 구절을 암송하거나 주일마다 얻은 단편적인 지식을 쌓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실제로 형성하고 가장 필요한 순간에 꺼내 붙들 수 있을 만큼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성장은 대개 조용하고 더디며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성경을 펼칠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원하지 않는 날에 다시 말씀을 펴는 것,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는 문제를 놓고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는 것, 아무도 자신의 선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리고 “정말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고 물으며 형식적인 대답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몇몇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순간들을 통해 서서히 자라난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담대함도 자라난다. 담대함은 원래부터 외향적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성격적 특성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뒤 담대함을 달라고 기도했고, 성경은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져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다고 기록한다. 바울 역시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의 확신은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 있었다.

실천 역시 성장의 일부다

젊은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때까지 예수님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그것이 자격 요건이라면 우리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을 말할 준비가 됐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빌레몬서 1장 6절에서 바울은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온전히 알게 하는 방향으로 역사하기를 기도한다. 여기에서 ‘나누는 것(sharing)’과 ‘아는 것(knowing)’은 서로 분리된 과정이 아니다.

젊은 신자가 직장 동료나 친구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나설 때,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때, 신앙에 관한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마다 그들은 실제로 자신의 믿음을 훈련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더 자주 자신이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누군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면 집으로 돌아가 성경을 펼친다. 이제 그 답을 정말 알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혹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뒤 하나님께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모습을 경험하면서 믿음에 대한 새로운 확신을 얻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을 나누는 것은 영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뒤에야 시작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하게 하시는 과정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단순한 통계 수치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부분이다.

예수님에 대해 기꺼이 이야기하려는 세대는 충분히 격려받을 가치가 있다. 성경은 그들에게 발을 딛고 설 단단한 반석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기도 안에서 성장하며,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뿐 아니라 왜 그것을 믿는지를 이해하고, 그 믿음을 평범한 일상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도록 곁에서 함께 걸어줄 수 있다.

주일에만 존재하는 신앙은 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가 안고 있는 오래된 인간의 문제다. 우리는 누구나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간극을 경험한다. 필자 역시 수년 동안 그 틈 사이에서 살았고, 당시 주일마다 필자 곁에 앉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그 사실을 눈치챈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필자를 진정 고무시키는 것은 이 세대가 이미 주님께 나아오고 있으며, 자신들의 목소리로 기꺼이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완벽히 깨달을 때까지 입을 다물라는 차가운 충고가 아니다. 마음 깊이 간직한 하나님의 말씀과 평범한 평일의 삶 속에서 그것을 살아낼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이 입으로 말하는 진리가 마침내 자신이 두 발로 딛고 서 있는 단단한 반석이 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 걸어줄 사람들이 필요하다.

주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화요일 역시 똑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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