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라는 만들어진 신화: 역사가 증언하는 이슬람의 기독교 탄압사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존 스톤스트리트 회장의 기고글인 ‘이슬람은 과연 기독교인들을 ‘매우 우호적으로’ 대했는가?'(Was Islam really 'very kind' to Christians?)를 7월 2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톤스트리트 회장은 콜슨 기독교 세계관 센터의 회장을 맡고 있으며 신앙과 문화, 신학, 세계관, 교육 및 변증법 분야에서 인기 있는 작가이자 연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일부 유명 팟캐스터들이 역사적으로 이슬람 정권이 기독교인들을 “매우 관대하게” 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방대한 역사적 기록과 쉽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무슬림 통치 아래 있던 기독교인의 처지는 시대와 지역, 통치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제한적인 보호와 공존이 이루어진 시기도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이슬람 통치가 전반적으로 기독교인에게 매우 관대했다고 일반화하는 것 역시 사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설명이다.

십자군 이전의 관계는 평화로웠는가

제1차 십자군 전쟁 이전 약 500년 동안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관계가 대체로 평화로웠다는 주장은 역사적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632년에 사망했다. 이후 이슬람 세력은 빠르게 팽창하며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던 성지와 북아프리카의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이어 이베리아반도를 정복하고 프랑스 남부까지 진격했다.

무슬림 세력은 남부 프랑스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알프스 인근에 거점을 마련했으며,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도 군사적 압박을 확대했다. 로마 외곽이 약탈당했고, 시칠리아도 이슬람 세력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1071년에는 셀주크 튀르크군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면서 아나톨리아 대부분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됐다. 이후 비잔틴 황제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이러한 정세는 제1차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됐다.

따라서 십자군 이전 수 세기를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가 평화롭게 공존한 시대로만 묘사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 시기에는 교역과 문화 교류도 있었지만, 동시에 정복과 전쟁, 억압과 종교적 긴장도 지속됐다.

딤미 제도 아래 놓인 기독교인들

이슬람 통치 아래 있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흔히 ‘딤미(dhimmi)’로 분류됐다. 이들은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무슬림과 동등하지 않은 법적·사회적 지위에 놓였다.

딤미는 특별 인두세인 ‘지즈야(jizya)’를 납부해야 했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집행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세금 납부 과정에 굴욕적인 절차가 수반되기도 했다.

세금을 감당하지 못한 이들은 재산을 잃거나 노예가 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지역과 통치자의 정책에 따라 교회가 몰수되거나 파괴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 역시 제한되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 종을 울리는 일이나 무슬림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이 금지되기도 했다.

새 교회 건축은 흔히 제한됐으며, 기존 교회를 수리하거나 증축하는 것도 통치자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슬림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됐고, 이슬람이나 무함마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행위는 중대한 범죄로 취급되기도 했다.

법정에서 기독교인의 증언이 무슬림의 증언과 동등하게 인정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기독교인이 무슬림을 지휘하거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제한되기도 했으며, 무기를 소지하거나 말을 타는 행위, 무슬림의 집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짓는 행위가 금지된 지역도 있었다.

또한 일부 시대와 지역에서는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무슬림과 구별되는 복장을 착용하도록 강요받았다.

물론 이러한 규정이 언제나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강도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딤미 제도 자체가 종교적 평등을 전제로 한 체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제한적인 보호와 명백한 법적 차별이 함께 존재한 제도였다.

기독교 성지는 보호됐는가

무슬림 통치자들이 기독교 성지를 일관되게 보호하고 훼손된 장소를 적극적으로 복구했다는 주장 역시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슬람 세력이 점령한 지역에서 일부 주요 교회는 모스크로 전환됐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다.

하기아 소피아는 약 천 년 동안 동방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는 대성당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에 함락된 뒤 모스크로 전환됐으며, 도시의 다른 여러 교회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예루살렘의 성묘교회는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기독교 예배 장소로 남아 있었지만, 항상 안전했던 것은 아니다. 1009년 파티마 왕조의 칼리프 알하킴은 성묘교회의 파괴를 명령했다.

이후 그의 후계자는 비잔틴 제국이 교회를 재건하도록 허용했다. 그 동기를 종교적 관용으로 볼 것인지, 정치적·경제적 필요에 따른 결정으로 볼 것인지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19세기 성묘교회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 오스만 제국은 외부의 기독교 자금으로 교회를 수리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를 오스만 정부가 직접 교회의 복구를 지원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이처럼 일부 성지가 존속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례는 존재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슬람 통치가 기독교 성지를 일관되게 보호했다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오스만 제국과 기독교 공동체

오스만 제국은 종종 다양한 종교 공동체를 포용한 제국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인과 유대인 공동체에 일정한 자치권을 부여하는 ‘밀레트’ 제도를 운영했다.

그러나 그 제도 역시 현대적 의미의 종교적 평등과는 거리가 있었다. 비무슬림 공동체는 제국 안에서 종속적인 지위에 놓였으며, 차별적인 세금과 여러 법적 제한을 감수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일정 기간 기독교 가정의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는 ‘데브시르메’ 제도를 시행했다. 이 소년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뒤 행정 관료나 예니체리 군단의 병사로 훈련됐다.

일부는 제국의 고위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 출발점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의 강제 분리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여성과 소녀들이 전쟁과 약탈 과정에서 노예로 끌려가거나 하렘으로 보내진 사례도 있었다. 기독교 공동체를 향한 폭동과 학살 역시 여러 차례 발생했다.

가장 참혹한 사건은 오스만 제국 말기에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 그리스계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벌어진 대규모 학살과 강제추방이었다.

20세기 초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집단학살로 규정하며, 아시리아인과 오스만 제국 내 그리스인들이 겪은 박해 역시 심각한 반인도적 범죄로 평가한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일부 관용 정책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인들이 겪은 구조적 차별과 폭력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박해

기독교인을 향한 종교적 박해는 오늘날에도 여러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이집트 등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납치와 강제 결혼, 신성모독 혐의, 집단 폭력, 교회 방화에 노출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보고된다.

일부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교회 설립과 공개적인 기독교 예배가 법적으로 금지되거나 엄격히 제한된다. 이슬람을 떠나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행위가 형사처벌이나 사회적 보복으로 이어지는 국가도 있다.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이 기독교 마을과 교회를 공격하고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납치하는 사건이 계속되고 있다.

유럽에서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테러와 기독교 상징물 훼손 사건이 발생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모든 무슬림에게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비판의 대상은 무슬림 개인 전체가 아니라, 종교를 명분으로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권과 법률, 이념, 무장단체다.

이스라엘과 이슬람권 국가의 비교

일부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발생하는 반기독교적 사건을 강조하면서, 이슬람 통치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에게 더 관대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현실을 단순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다.

이스라엘에서도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한 폭언과 침 뱉기, 기물 훼손과 같은 반기독교적 사건이 보고돼 왔다. 이러한 행위는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며, 이스라엘 정부와 사회는 기독교 공동체의 안전과 종교의 자유를 더욱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기독교인들은 법적으로 시민권과 참정권, 예배와 교회 설립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는 학교와 병원, 종교기관을 운영할 수 있으며,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실은 기독교로의 개종이나 교회 건축, 공개 예배가 법적으로 제한되거나 금지된 일부 이슬람 국가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발생하는 반기독교적 행위를 비판하는 것과, 이슬람 통치의 역사적 차별과 박해를 축소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한쪽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다른 쪽의 역사적 현실을 미화할 필요는 없다.

“이슬람은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관대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며 역사적 기록 전체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무슬림 통치 아래 기독교 공동체가 제한적인 보호를 누리고 번영한 시기와 지역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법적 차별과 종교적 억압, 강제 개종과 노예화, 교회 파괴, 집단 폭력과 학살이 존재했던 것 역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를 정직하게 이해하려면 관용의 사례만 선택적으로 강조해서도 안 되고, 박해의 사례만으로 모든 시대와 지역의 무슬림을 동일하게 규정해서도 안 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종속적인 지위를 강요받고,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자유가 제한되며, 개종과 전도가 처벌되고, 특별세와 법적 차별을 감수해야 했던 상황을 ‘매우 관대한 통치’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은 미화가 아니라 정직한 검토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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